기후재난리포트12 ⑩ 양수발전 | '효율'의 함정과 '정의'로운 전환
- Dhandhan Kim
- 8월 28일
- 4분 분량
2025-08-28 김복연 기자
홍천 양수발전소 갈등은 ‘효율’이라는 좁은 계산 논리가 주민 권리와 공동체를 억누르는 현실을 보여 준다. 국제사회는 이미 정의로운 전환을 기후 대응의 필수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해외 사례도 효율 중심 전환이 갈등과 파괴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한국 역시 새만금·4대강·강정마을·설악산 사례에서 같은 교훈을 반복해 왔다. 기후위기의 시대,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더 많은 효율이 아니라 기후정의에 기반한 정의로운 전환이다.

거시적 효율을 외면한 산술의 덫
기후위기 대응을 이야기할 때마다 ‘효율’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지구 생태계가 수십억 년 동안 유지해 온 거대한 순환과 조화를 떠올리면, 기술과 자본의 언어로 말하는 산술적 효율은 턱없이 협소하다. 숲은 탄소를 저장하고 물을 품으며 생명을 살린다. 바다는 산소를 생산하고 기후를 조절한다. 이처럼 거시적 효율은 인간이 만든 어떤 장치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퍼센트의 에너지 손실, 얼마만큼의 전력 저장, 비용 대비 효과 같은 수치에 매달린다. 기술적 효율성은 절대적 기준이 되고, 그 계산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가치는 뒷전으로 밀린다. 이는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을 낳은 자본주의적 사고와 기술만능주의의 연장선일 뿐이다. 홍천양수발전소 사태는 그 함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효율의 언어, 주민을 침묵시키다
홍천에 추진 중인 600메가와트 규모의 양수발전소는 정부가 ‘전력 수급 안정화와 재생에너지 변동성 대응을 위한 천연배터리’라고 내세우는 사업이다. 지자체는 이를 ‘지역소멸 방지’의 대안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중앙정부와 지자체조차 주민 설득의 근거를 통일하지 못했다.
풍천리에서는 2019년 마을투표에서 주민의 97%가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후에도 7년 넘게 반대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군청은 환경영향평가 초안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이 요구한 토론회도 열리지 않았다. 반대 의견은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프레임 속에 묻혔다. 효율의 언어가 주민의 언어를 억누르는 도구가 된 것이다.
국제사회가 말하는 ‘정의로운 전환’

이 문제는 단순한 지역 갈등이 아니다. 국제사회는 이미 기후대응에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필수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기후정책이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고, 유엔 인권이사회는 ‘기후정책은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럽연합(EU)은 2021~2027년 1750억 유로 규모의 정의로운 전환 기금(JTF)을 마련했으며, 이를 포함한 정의로운 전환 메커니즘(JTM)은 총 550억 유로의 재원을 동원하도록 설계됐다 .
정의로운 전환은 이미 국제 규범이다. 홍천처럼 주민의 동의 없이 추진되는 사업은 국제적으로도 ‘정의롭지 못한 전환’으로 평가받을 위험이 크다.
단기적 효과 vs 장기적 피해
양수발전소 건설은 단기적으로 지역경제에 활력을 줄 수 있다. 건설업, 숙박업, 요식업이 살아나고 일부 고용 창출과 세수 증가가 가능하다. 이는 대부분 일시적이다. 국내에서 운영 중인 6개 양수발전소의 상시 고용 인력은 발전소당 수십 명 수준에 불과하며, 전문 인력 상당수는 외부에서 충원된다.
남는 것은 산림 훼손과 공동체 갈등이다. 풍천리에서는 이미 찬성하는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 사이의 골이 깊어져 공동체가 크게 갈라진 상태다. ‘지역소멸 방지’라는 명분은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지역의 생태와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역설로 돌아온다. 계산기의 숫자 속에서 자연과 사람의 가치는 지워졌다.
해외 ‘효율’이 낳은 갈등
홍천의 상황은 한국만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도 ‘효율’과 ‘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대형 사업들이 지역 공동체와 충돌해 왔다.
인도의 나르마다댐은 수십만 명에게 전기를 공급하고 농업용수를 확보한다는 약속으로 시작됐다. 실제로는 20만 명 이상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200여 개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국가 발전이라는 거대한 명분은 남았지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게 그 논리는 공허했다. 결국 이 사업은 30년 넘게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으며 ‘개발의 대가’를 묻는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독일 루체라트는 유럽 에너지 전환의 역설을 드러낸다. 독일 정부는 석탄을 줄이겠다고 선언했지만, 에너지 안보와 단기적 전력 수급을 이유로 갈탄 채굴을 강행했다. 2023년 1월, 경찰 수천 명이 투입되어 마을 주민과 기후활동가들을 강제 퇴거시키면서 작은 농촌 마을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이 사건은 유럽 사회 전체에서 정의로운 전환의 의미를 되묻는 계기가 됐다.
스페인 갈리시아에서는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이름으로 풍력단지가 추진됐다. 주민 동의 부족과 생태계 훼손 문제가 불거지면서 법원이 70여 개 프로젝트를 가처분해 약 2GW 규모의 개발이 중단됐다. 하지만 2025년 8월, 유럽사법재판소(ECJ)는 갈리시아의 인허가 절차가 EU법에 부합한다고 판시하며 재가동의 길을 열었다. 기후위기 대응이 아무리 시급하다 하더라도, 지역 주민의 동의 없는 전환은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반복된 국책사업의 그림자
홍천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과거 한국 사회가 겪어온 국책사업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새만금 간척사업은 ‘국가 성장’이라는 구호로 시작됐지만,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갯벌과 어장이었다. 세계 최장 33.9㎞ 방조제는 기네스 기록에 올랐지만, 수백 년 동안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어민들은 생존권을 잃었다.
4대강 사업 역시 비슷했다. “홍수를 막고 수질을 개선하겠다”는 명분으로 추진됐지만, 수천 명의 농민과 어민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났고, 감사원 감사에서도 사업 전반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강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고, 생태계는 무너졌다.
제주의 강정마을에서는 주민 다수가 반대 의사를 표했음에도 국가안보라는 명분으로 해군기지가 강행됐다. 반대 주민들은 범법자로 몰렸고, 마을 공동체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
설악산 케이블카 추진 역시 보호지역 지정에도 불구하고 개발 논리가 앞섰다. 환경부는 2019년 부동의 결정을 내렸지만, 2023년에는 조건부 동의로 입장을 바꾸며 논란을 키웠다 .
이 모든 사례는 하나의 교훈을 남긴다. 국책사업은 언제나 국가적 필요와 경제 효과를 앞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주민의 권리와 공동체의 존엄이었다. 홍천이 오늘 겪고 있는 상황은 결코 새롭지 않다. 한국 사회가 반복해 온 개발의 방식이 또 다른 이름으로 되살아났을 뿐이다.
기후위기 앞에서 단일 해법은 없다
재생에너지 전환 앞에서 “유일한 해법”을 주장하기는 위험하다. 특정한 방법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 방법을 강행하기 위해 많은 걸 파괴하고 희생시키는 논리가 지배한다. 에너지 전환, 산림 보전, 산업 구조 개혁, 그 어느 것도 단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이해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를 풀어내는 열쇠는 민주적 절차와 사회적 합의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과정에서만 공동체는 위기 앞에 버틸 힘을 얻는다. 정의로운 전환은 민주주의적 절차를 기후대응의 중심에 두는 것에서 시작한다.
홍천에서 시작해야 할 질문

홍천 양수발전소 갈등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기후전환의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기후대응이라는 이름으로 주민을 침묵시키고, 민주주의를 훼손하며, 생태를 파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진정한 기후전환은 주민과 공동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과정에서, 지역의 생태적 자원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홍천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지 한 지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정의로운 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그 시험을 통과하는 길은 효율의 논리를 넘어, 정의와 민주주의의 절차를 기후대응의 중심에 놓는 일이다. 더 나아가 기후정의라는 원칙과도 맞닿아 있다. 기후정의는 단순히 온실가스를 줄이는 기술적 전환이 아니라, 위기의 책임을 더 많이 가진 이들이 더 큰 부담을 지고, 피해에 취약한 이들이 보호받으며, 미래 세대와 생태계가 존중되는 사회적 전환을 뜻한다.
따라서 정의로운 전환이란, 결국 기후정의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홍천에서의 갈등은 이 원칙을 한국 사회가 실제로 지켜낼 수 있는지 시험하는 무대다.
왜 민주주의를 끝까지 밀처부쳐야 하는지 잘 설명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