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서리가 내리는, 상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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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4 배이슬
"된서리가 내리면 더운 시간을 사는 식물들은 모두 얼어 죽는다. 그래서 서리는 ‘끝’을 생각하게 한다. 이른봄부터 싱그럽던 초록과 생기가 일순간 말라 사라진다. 할머니는 그렇게 서리 맞아 죽은 것들은 ‘삶아 죽었다’고 표현했다. 이른 아침 된서리를 맞은 것들이 아침에 나가보면 꼭 끓는 물에 펄펄 삶아 낸 것처럼 갈색으로 무르고 축축하게 주저앉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거두어 들이고 마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늦서리가 내리면, 첫서리가 내리면
상강은 서리 상(霜), 내릴 강(降), 서리가 내리는 때라는 뜻이다. 백로에 이슬이 맺히고, 한로에 차가워지다가 점점 더 온도가 떨어져 0℃ 이하로 떨어지면 서리가 내리는 것이다. 서리가 내리는 것은 맑은 날, 바람이 약한 밤에 수중기가 이슬로 맺히는 동시에 어는 점 이하로 떨어진다.
‘서리’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간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다. 봄에는 언제나 서리가 그만 올까 모종들을 보며 종종 거리고, 가을에는 서리가 언제 오게 될지, 덜 거둔 것들을 보며 동동 거리게 된다. 따뜻한 시간을 사는 대부분의 작물들이 밭으로 갈 때는 마지막 서리가 내리는 날인 ‘늦서리(만상일)’을 보고 결정한다. 수확하는 마지막 시간이자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의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처음 서리가 내리는 ‘첫서리(초상일)’을 보고 정한다.
부지런한 농부는 첫서리가 반가울 텐데, 게으른 농부인 나는 서리 오기 전에 덜 거둔 것들에 애타는 일이 많았다. 뿐이랴 4~5년 전부터는 내내 날이 더워져 가을이 여름날 같다가 하루아침에 서리가 오곤 했다. 서리가 예고 없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하늘이 맑아 상강 전에 온갖 곡식을 거두어야 하는데 올해는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어렵게 보살펴 겨우 잘 자랐는데 고구마는 땅이 질어 썩어갈 것이 보이는데도 수확할 수 없고, 잘 영근 벼가 눈앞에서 드러눕고 병이 든다. 뿐이랴 추워지며 줄어들 벌레와 병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배추도 주저앉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들깨는 빗물을 잔뜩 머금어 썩어버린다. 이웃이 그나마 영근 것이라도 털어 보겠다고, 한줌 씨라도 건질까 들깨를 털었는데 이미 썩은 꽃숭어리에서 떨어진 깨는 물러 있다. 이처럼 가을장마 지듯 비가 내리니 맑은 가을 날 더위에 여물고 추위에 맛이 들어야 할 작물들이 병이 들고 농부들 속은 썩고 있다. 올해도 비가 내리니 서리는 늦어지다가 어느 맑은 날 갑작스레 된서리로 올 것이다.
‘끝’으로 ‘연결’을 만들어 내는 된서리
된서리가 내리면 더운 시간을 사는 식물들은 모두 얼어 죽는다. 그래서 서리는 ‘끝’을 생각하게 한다. 이른봄부터 싱그럽던 초록과 생기가 일순간 말라 사라진다. 할머니는 그렇게 서리 맞아 죽은 것들은 ‘삶아 죽었다’고 표현했다. 이른 아침 된서리를 맞은 것들이 아침에 나가보면 꼭 끓는 물에 펄펄 삶아 낸 것처럼 갈색으로 무르고 축축하게 주저앉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거두어 들이고 마치는 시간이 온 것이다.
다만 달라진 기후는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게 더운 가을 사이 예고 없는 된서리로 상강을 맞이한다. 하루 전 만해도 20℃에 물놀이를 하다 다음날 새벽에 5℃로 뚝 떨어진 시간을 맞는다. 사람, 식물, 곤충 할 것 없이 서서히 익숙해지는 추위가 아닌 느닷없는 추위에 놀라게 된다.
상강이 지나면 입동이 온다. 그렇게 서리가 내리는 상강은 가을의 끝, 겨울을 시작을 안내한다. 서리를 맞으면 여지없이 ‘삶아 죽는’ 고추, 가지, 토마토나 맛이 떨어지거나 보관이 어려워지는 쌀이나 고구마, 토란을 보면 상강은 다르게 읽으면 끝나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나버리는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면 어떨까. 아주 따뜻한 나라처럼 토마토나 고추가 나무처럼 자라는 상상을 종종한다. 키만큼 자란 토마토를 매년 심지 않고 따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서리가 내리지 않는다는 건 지금껏 더위에 길어지고 있는 병과 벌레도 더 많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서리가 내리고 겨울을 맞이해야만 다음 해 농사가 가능해진다. 온갖 풀로 무성했던 들판과 밭은 키만큼 자랐던 풀들이 삶아 죽어 주저앉고, 겨울 동안 눈에 눌려 보다 빠르게 다시 생명을 키우는 흙이 된다. 그렇게 왕성하게 배추를 몽땅 먹어치우던 잎벌레들도 추위에 죽고, 이듬해 다시 생명을 이어간다. 덕분에 다시 배추를 심는다.
상강의 된서리가 가지고 오는 ‘끝’은 한없이 무성할 것만한 것들을 끊어내고, 정리하는 시간이다. 그 ‘끝’이 결국은 다음을 ‘연결’한다.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할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애쓴다. 된서리에 끝을 맞은 들판의 풀이, 갈색으로 말라죽는 토란대가 그렇게 흘러가고 연결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끝이 있어야 연결되고 다시 살아나는 수많은 흐름 안에 함께 있다고 말이다.
한해 김치맛은 상강에 달렸다
그렇게 ‘끝’일 것 만 같은 된서리에야 맛이 드는 것들이 있다. 된서리 전까지 더해지는 추위에 맛이 드는 무와 당근, 매운맛이 더해지며 부드러워질 갓과 무, 서리가 오고 녹고를 반복하며 단단해지고 맛이 드는 배추 등 ‘김장 채소’들이다.
부쩍 자란 무. 사진_배이슬
그래서 “한 해 김치 맛은 상강에 달렸다”는 말이 있다. 상강하기에 따라 1년 내 먹을 김치 맛이 좌우된다. 진안은 산이 많고 찬 기운이 머무르는 지형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게 추위로 맛이 들고, 김장 이후 김치가 빠르게 익지 않으니 비교적 일찍 김장을 할 수 있다.
기후위기가 얼만큼 왔는지, 농사를 지으면 체감되는 순간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김장을 하던 때의 날들을 비교하면 아주 크게 차이가 난다. 중학교 때쯤 김장을 위해 온 가족이 배추를 수확하던 때, 배추를 들어 나르는 때 장갑 낀 손 안으로 손이 시려웠다.
상강부터는 온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마늘은 몇 접씩 까고, 액젓을 다리고 맑게 거른다. ‘김장’은 배추에 양념을 바르는 잠깐이 아니라 한달 내내 진행된다. 고추가 자라 말리고, 가루로 빵구어 오는 시간과 배추가 자라 절임배추가 되기까지가 걸리고도 한 달 내 다듬고 손 보태야 김장을 할 수 있다. 그렇게 상강이 지나고 입동이 오는 사이 김장을 한다.
가지각색 크고 작은 배추들을 간을 절일 때면 적당한 때 소금물을 헹구느라 할머니는 이른 새벽에 미안해 하면서도 손 보탤 사람이 없으니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아이고, 아가 어찌냐 배추를 지금 안 씻으면 짜게 생겼다. 이놈 (내복) 단단히 입고 나와”
잠이 깨지 않아 한참만에 뒤적이며 내복 챙겨 입고 할머니를 쫓아 나가 배추를 헹궜다. 목장갑에 고무장갑까지 끼고 배추를 씻는데도 손이 시려웠다. 땀이 팩팩 나도록 배추를 씻다 보면 입김이 얼었다. 서걱서걱 서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이른 새벽 배추를 씻으면 할머니는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걱정 어린 목소리로 “이 찌깐한 것이 없었으면 어찌 했을꼬” 했다. 퍽 허리도 아프고, 춥기도 했지만 끝날 때까지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비료 없이, 진딧물이 반절 먹고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반절 먹고 남은 단단한 배추들은 그렇게 공을 들여 김치가 되었고 그렇게 상강과 나와 할머니가 하기에 따라 맛이 든 김치는 3년, 4년이 되어도 무르지 않고 잘 익었다. 상강에 맞춰 결국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따라 손을 보태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상강의 농살림
상강에는 이렇게 김장을 준비하고, 곡식을 수확하고, 저장하는 일들을 한다. 겉보리, 밀을 마지막으로 뿌리고, 마늘은 심고, 양파는 모종을 낸다. 숲밭에는 겨울이 있어야 피어날 구근들을 심는다. 깊디 깊게 심은 것들은 겨우내 추위를 품고, 까마득히 잊고 있으면 여기 잘 있었다고 이른 봄을 가지고 온다. 콩과 깨를 거두고 배추와 함께 심은 쪽파들이 한 뼘만큼 자랐다. 뿌려 둔 무가 잔뜩 올라왔고 시금치, 당근은 찬찬히 싹을 냈다. 그렇게 가을에 수확해 내내 먹을 것들이 상강까지 부지런히 제몫을 하는 시간이다.

상강이 오면 곶감 깎을 단단한 감을 딴다. 뒷산에 조막만한 먹감은 이맘때 따고 깎아 마루에 줄줄이 달아두면 겨우내 조물거리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매번 다른 맛으로 딱 먹었다. 조금이라도 할머니는 명절과 제사에 쓸 곶감을 열심히 깎아 만들었다. 한겨울 새까매진 곶감 위에 하얗게 분이 않으면 냉동실에 넣어 두고 상에 올렸다. 진안의 운장산 자락 학동마을과 궁항리 두 곳은 ‘고종시’로 감을 깎는다.

진안의 몇 개의 마을은 이렇게 같은 감나무도 씨앗이 없고 추위가 골짜기로 모여 머무르니 씨 없는 특별한 곶감이 난다. 점점 가을 겨울이 습하고 덜 추워서 곶감을 깎아 말리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다. 푹 익어 홍시가 되어 빠져버리기 일쑤고, 곶감으로 매달아 놓은 것들도 곰팡이가 피어 버린다. 이제 온전히 얼고 마르기를 반복해 하얗게 분이 난 곶감은 못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
상강은 더는 늦지 않게 벼베기를 해야 하는 때다. 늦지 않게 벼를 베야 하는 시기인데, 모두 드러누운 벼를 베지 못해 속이 타는 가을이다. 중간중간 엎친 벼 사이로 나락을 베니 콤바인을 가진 곳에 일찍이 부탁해 뒀지만 언제나 되야 벼를 벨 수 있을지 모른다. 올해도 한해 먹을 밥과 술과 조청이 될 쌀을 겨우 수확하겠지만, 타버린 속은 나아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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