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여름에 이르는, 하지
- hpiri2
- 6월 20일
- 6분 분량
2025-06-20 배이슬
"땅속줄기인 감자는 장마에 더덕더덕 딱지가 앉거나 영양과 물이 많으니 땅속에서 썩어버리기도 한다. 해가 좋을 때 캐 바람 치는 그늘에 말려야 오래 두고 먹을텐데, 물속에 있다 캐면 오래 보관하기 어렵다. 그래서 감자의 맛이 드는 시간과 장마가 내리는 하늘의 시간 사이에서 고뇌한다. 오늘 캘까? 며칠 더 둘까?"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편집자주 농가월령가'는 조선 시대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농가에서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할 일을 달의 순서로 읊을 수 있도록 만든 노래이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농꾼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거둘까? 전북 진안의 배이슬 농꾼은 "24절기는 해의 시간, 달의 시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시기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올 한 해 절기마다 그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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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이르는, 하지
하지는 여름 하(夏), 이를 지(至)를 쓰는 여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하지는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시계를 보고 하늘을 보면 '아직도 밝네?' 하고 새삼스레 놀라는 때이기도 하다. 입하부터 시작된 여름인데 하지는 왜 여름에 이르렀다고 할까. 한낮의 해가 가장 짙은 12시보다 오후 2~3시가 더 더운 것처럼, 하지 때 길어진 낮 동안 쌓인 온도가 외려 7, 8월에 더위를 만든다. 하지의 다른 어원을 들여다보면 해가 멈춘다는 뜻도 있는데, 이는 길어지던 해가 하지를 중심으로 짧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어진 낮들의 시간이 모여 여름에 이르게 하는 때가 하지, 여름에 이른다는 의미다.

여름을 한 아름 저장해야, 한 철을 먹고 살 수 있어
여름에 이르는 하지에는 장마와 가뭄 사이 어딘가에서 부지런히 수확도 하고 말려야 하고, 그 사이 콩이나 깨 같은 작물은 부지런히 심기도 해야 하는 때다. 언제나 그렇지만 하지쯤에는 더욱 하늘을 자주 올려다봐야 한다.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만큼이나 자연에 기대어 심고 거두고 말리는 등, 여름을 한 아름 저장해야 한 철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의 양도 많아지지만, 날씨가 덥고 습해지니 같은 일도 몸으로 느끼기에는 더욱 힘이 든다.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
하지가 되면 여지없이 장마, 긴 시간 비가 내린다. 데워진 땅에서 올라간 물들이 땅으로 되돌아오는 긴 시간은 농부의 마음을 종종거리게 한다. 밭에 머무를 수 없지만, 할 일이 태산 같고,긴 비에 작물들이 상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긴 비에 땅이 질어지고 작물이 숨쉬기 어려워지기 전에 잘 거두고, 논의 둑이 터지지나 않을지 비 사이를 뚫고 논밭을 더듬거리는 일이 일상이다. 장마가 이어지는 하지에는 ‘하지가 지나면 구름장마다 비가 내린다.’라는 속담이 있다. 어느 구름 속이든 비가 들어서 구름만 지나가도 비가 온다고 이야기한다.
새로 자란 모 줄기에 낟알이 달린다
그렇게 내리는 비 덕에 습하고 더운 날씨가 된다. 농부는 벌레에 뜯기며 숨이 차는 시간이지만, 더운 날을 좋아하는 벼에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 모는 더워지는 시작에 여러 개의 새 줄기를 만들어 내는데, 이때 만들어진 새 줄기에 낟알이 달린다. 이때 부쩍부쩍 하루가 다르게 논의 초록이 채워지는 걸 보며, ‘하지가 지나면 아침에 심은 모하고 저녁때 심은 모가 다르다’라는 말을 눈으로 만날 수 있다.

논풀들을 뽑고, 논둑을 덧바르고, 물꼬를 열고 닫느라
그렇게 벼가 잘 자란다는 것은 벼를 닮은 식물들도 자라기 좋은 시간이라는 뜻이다. 논에서 자라는 피, 방동사니 등의 풀들이 모보다 더 크려고 애를 쓴다. 우렁이를 넣고 많이 줄었지만 모내기하기 무섭게 피살이를 하느라 허리 펴기 힘든 날들도 있었다. 논 잡초라 불리는 논풀들을 뽑고 논둑을 덧바르고 물꼬를 열고 닫느라 논에 사는 때가 하지다. 벼가 부쩍 자라는 이때 특히 물을 잘 대야 하니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이 한 살이를 접을 때
하지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 낮이 긴 만큼 더위가 슬금슬금 올라오는 때다.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에게는 이제 씨앗을 남기고 한 살이를 접는 때다. 보리 환갑이고 감자는 캐 먹는 날이라는 말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른 봄 심은 상추, 배추, 파는 씨앗으로, 감자는 덩이줄기로 다음을 준비한다.




감자 감자 하지감자
4년 전부터는 감자를 제때 수확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쯤부터 가뭄과 때 모를 된서리를 피해 늦되게 감자를 심기 시작했는데, 장마는 되려 빠르게 와서 더 오래 오거나 한 번 더 오기도 한다. 사람들은 감자를 수확하는 시기로 ‘하지’를 기억하기도 하는데 양파와 마늘, 감자 등을 거두어 들이는 때는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작물이 알려주는 때와 하늘의 때에 달렸다. 큰 키를 자랑하던 줄기가 맥 없이 툭 하고 꺽이면 양파를 거두고, 빳빳하던 잎이 누렇게 잎끝이 마르기 시작하면 마늘을 거둔다. 작물이 ‘아이고 더워서 더는 못 살겠다! 긴 여름잠을 자고 가을에 자라야지!’ 하고 내 모은 것들을 차곡차곡 모으는 때, 그렇게 모두 모아졌을 때 거둔다.

감자와 나와 하늘 사이에 치열한 눈치 싸움
감자도 마찬가지다. 감자의 잎줄기가 누렇게 마르고 갈색이 되면 감자를 수확한다. 할머니는 그래야 감자에 ‘맛이 든다’고 했다. 그 며칠 더 둔다고 감자의 개수가 더 늘지는 않지만 열매도 나무에서 마저 익어야 맛과 향이 더 좋은 것처럼, 감자도 제 잎줄기의 먹을 것을 온전히 모으니 제대로 맛이 든다. 그렇게 맛 들 때까지 내비두면 좋을텐데, 길어진 장마는 잎이 마르기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다.
땅속줄기인 감자는 장마에 더덕더덕 딱지가 앉거나 영양과 물이 많으니 땅속에서 썩어버리기도 한다. 해가 좋을 때 캐 바람 치는 그늘에 말려야 오래 두고 먹을텐데, 물속에 있다 캐면 오래 보관하기 어렵다. 그래서 감자의 맛이 드는 시간과 장마가 내리는 하늘의 시간 사이에서 고뇌한다. ‘오늘 캘까? 며칠 더 두면 잎이 말라 맛있어질 것 같은데, 며칠 있다 캘까? 고사이 비가 잡혔다 말다 하던데’ 마음먹고 기다리면 예기치 않은 비가 와버리기도 하고, 걱정이 많은 이는 일찍이 캐어 놓고 날이 좋아 아쉬워하기도 한다. 감자를 수확하는 일은 그렇게 감자와 나와 하늘 사이에 치열한 눈치 싸움이 된다.

하지의 숲밭, 거둘 것이 많다
감자 못지 않게 숲밭에서 거둘 것이 많은 때다. 다른 나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 사이마다 심은 서양딱총나무(엘더베리)가 하얗게 눈 내린 것 마냥 꽃을 피웠다. 엘더베리꽃을 따다가 여름 음료를 만들어 먹는다. 여름 꽃대가 나오기 전에 오레가노, 레몬밤, 민트들도 부지런히 베어다 말리고 기름에 담그고 식초에 담근다. 하지에는 여름을 먹고 저장한다. 벌레도 많아지고 풀도 허리춤까지 자라니 예취기나 낫으로 풀을 벤다. 씨앗 받을 당근도 꽃대를 올리고 씨앗을 준비한다.
하얗게 핀 엘더베리 꽃과 여름을 품은 것들을 부지런히 먹고 저장한다. 사진_배이슬
고구마는 늦게 심어야 추워질 때 맛이 든다
모내기를 마쳤으니 고구마를 심는다. 근래에는 점점 이르게 고구마를 심는데, 더워진 만큼 너무 이르게 심으면 고구마에 심지가 박히고 크기만 커져 먹기에 좋지 않다. 다들 부지런하게 고구마를 심을 때 조바심이 들어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손모내느라 바빴을 시절에도 고구마는 모내기 다 마치고 늦게 심었다고, 알맞게 자란 고구마가 추워지는 때 맛이 드니 할머니는 마을 할머니들이 고구마 모종 한 단씩 사다 심을 때에도 더 늦게 심어도 된다며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모내기 다하고 감자 다 캐면 고구마를 심는다. 사진_배이슬
들깨가 들어야 하니, 밤에 가로등을 끄라고
참깨는 아카시아 필 때 바로 심었다면 들깨는 밭 한 구석에 모종으로 자란다. 한 뼘만큼 자란 들깨는 꼭 옮겨 심어야 들깨가 든다. 모내기도 하고 감자도 거두면 감자 밭에 들깨를 심었다. 낮의 길이에 가장 예민한 친구 중에 하나가 들깨인데, 들깨는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때 자라야 꽃을 피우고 깨가 든다. 그래서 종종 마을에서는 밤에 가로등을 끄라며 민원을 넣기도 하는데, 이는 밤에 켜 둔 가로수 빛에 들깨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이용해 되려 밤에 불을 켜서 꽃이 피지 않게 해서 내내 깻잎을 수확하기도 한다.
여름을 먹어 힘을 내는 때
늘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혼나는 내게 하지는 여름일이 힘든 때인 동시에 가장 많이 잘 먹는 때다. 여름은 열매의 계절이라 오디와 앵두, 버찌로 시작해 밭에 가는 길에 블루베리도 잘 익어가서, 한 움큼 입에 몰아넣고 밭일하러 가는 때다. 일찍 심은 여름 호박, 쥬키니도 따고, 샐러드 상추도 따고, 거둬 들인 햇마늘과 양파, 감자로 요리한다. 볶든 지지든 굽든 찌든 없던 입맛도 끌어모아 내는 한 끼를 만들 수 있다. 이 맛은 차를 타느라 지치지 않은 신선함이 땅맛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덕분이다. 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논과 밭에서, 들에서 장을 보듯 앞치마 가득 모아 밥을 먹는다. 여름을 먹어 힘을 내는 때다.
여름에는 집으로 가는 길에 밭에서 장을 본다. 신선함이 가진 땅맛은 어떻게 요리하든 맛있는 한 끼가 된다. 사진_배이슬
어렸을 때 맛나게 먹던 하지감자가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