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
- hpiri2
- 9월 19일
- 6분 분량
2025-09-19 배이슬
"쌀알을 동동 뜨게 하는 식혜, 보슬보슬 팥시루떡, 쓴맛이 나지 않게 지진 도라지 나물, 누구나 먹으면 어찌 만들었냐고 묻는 할머니만의 비밀 레시피 초무침까지 명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공들여 온 할머니의 레시피를 전수받는 시간이었다. 그 마음까지 말이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들깨, 밤의 달빛이 소중한 식물
추분은 가을 추(秋), 나눌 분(分)을 써서 가을의 가운데를 의미하며, 이날을 분기점으로 점차 밤의 길이가 길어진다. 드디어 완연한 가을 맛이 나는 때다. 하지에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동지에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 그 사이에 든 봄의 춘분과 가을의 추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때로 일장의 길이 변화에 중요한 지점이다.
식물은 낮의 길이가 길어질 때 꽃이 피는 종류와 밤의 길이가 길어질 때 꽃이 피는 작물, 낮과 밤의 길이와 관계없이 연속적으로 꽃이 피는 식물로 구분하는데, 대표적으로 밤의 길이가 길어질 때 꽃이 피는 작물이 바로 들깨다. 농촌에서는 가로등이 있어도 일찍 가로등을 끄라는 민원이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밤의 길이가 길어져야 꽃이 피어 씨를 맺는 들깨는 가로등 불빛에 씨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식물이 자라는 데 햇볕을 중요한 요소로 알지만 낮의 햇볕만큼이나 식물에 밤의 달빛도 중요한 요소다.
균형과 조화의 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를 말하는 추분은 다르게 보면 균형과 조화의 날이다. 살아가는 날이 어딘가로 치우치기 마련이지만, 결국 그 가운데 중심을 잡는 균형의 때를 지나며, 그렇게 흔들흔들 뒤뚱뒤뚱 살아내는 것이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일임을 되새기는 날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때, 또 다른 계절의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추분이 지나서 밤이 길어지면 하지를 지나 무더운 날씨를 만들었던 것처럼 점차 추워질 일만 남았구나 하고 알 수 있다. 같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이지만 아직 여름의 기세가 남은 추분은 춘분보다 다소 덥다. 작물과 농부에게는 마지막 힘을 다해 영글어 갈 힘이 된다.
완연한 가을에 섰으니 모든 농삿일은 가을걷이가 한창 바빠진다. 이른 봄부터 애쓴 흔적들이 보람되게 차곡차곡 쌓이는 때이자 언제 영그나 하던 벼가 고개를 숙이는 때다.
추분에 거두어 들이는 것들, 검정찰옥수수 2종류와 가지 씨앗, 수세미를 거두었다. 사진_배이슬
달라진 가을 기후, 벌레가 숨지 않는다
한여름에야 잘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기후의 변화가 가을에 들어서니 얼마나 달라졌는지 체감하게 된다. 볕 좋은 가을이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가을에 내다 말리다가 때아닌 비에 홀딱 젖거나 습해져 탱이가 나는 일이 많아진 것이 벌서 6~7년은 족히 되었다.
가을걷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잘 갈무리하는 것이다. 얼마나 잘 말리고 갈음했는지에 따라 1년을 먹고 씨앗을 둔다. 여름 뙤악볕보다 선선히 바람 치는 가을볕에 말리면 바스락 부숴지게 수분만 날아가는 게 아니라 맛이 들고 천천히 속까지 잘 마른다. 그러나 가을장마가 지고 습해진지 오래되어 가을걷이가 몇 배로 힘이 들어졌다. 추분 즈음의 속담들에서도 기후위기로 달라지 가을의 기후가 드러난다.
‘덥고 추운 것도 춘분과 추분까지다.’라는 속담은 겨우내 춥다춥다 해도 춘분이 지나면 해가 길어지며 날이 풀리고, 덥다덥다 해도 결국 추분이 오면 더위가 가신다는 이야기다. 안타깝게도 백로와 추분 즈음에 있는 추석이 오면 으레 추위가 제법 들기 시작했었는데, 옛일처럼 느껴진다. 추분이 왔지만 밤은 제법 쌀쌀해도 여전히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추분이 지나면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가 숨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가을이 들어설 무렵에는 태풍이 오거나 대기가 불안정해서 예기치 않은 마른날 비나 천둥번개가 잦았다. 그에 비해 가을이 완연해지는 추분쯤이면 하늘이 높고 선선한 가을의 날씨가 되어 천둥번개 소리가 멈춘다. 한데, 지금 이 순간에도 갑작스레 여름 소낙비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다.
추위를 알아차린 벌레들도 슬슬 줄어든 때라지만, 한여름에 적었던 모기에 이어 배추에 붙은 잎벌레들이 숨을 줄 모르고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잎벌레에게야 더 많이 먹고 번식하기 좋은 기후가 계속되니 제 꼴대로 살아내는 것일 텐데, 부러 늦되게 배추를 심은 것이 무안할 만큼 이전보다 가을 벌레들이 많아졌다. 아무리 기후위기라지만 24절기에 제법 맞게 지나는 것을 보아 내심 안심했었는데 속담으로 미루어 보아 ‘가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새삼 무서워진다.
일 년간 지은 먹을거리로 마음을 나누는, 추석
가을걷이로 먹을 것이 한창이니 추석이 이즈음에 있다. 추석은 가을의 한가운데를 뜻하고, 음력 8월 보름날이다. 24절기와 달리 달의 흐름으로 잡아 매년 조금씩 날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 유난히 밝은 가을밤에 추석을 맞는다. 한해의 거둔 것들을 감사하며 햇것들로 상을 차린다. 올해의 먹을거리가 결국 기나긴 시간을 거쳐 왔으니, 그것들을 거둘 수 있게 이어 준 이들에게 감사하고, 공들여 애쓴 이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날이 추석이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날이 쌀쌀해져서 긴팔을 껴입고 명절 음식을 장만한다고 이 밭 저 밭 배추 뽑고 당근뽑고 돌아 댕겼었는데, 근래 몇 해 동안은 추석에도 덥고, 더위도 길어져서 작물 거두기가 마땅찮아 준비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추석에는 특히 할머니 손이 아주 커져서 설날보다 음식 장만이 배는 되었다. 설에 못 온 지인과 일가친척들이 성묘 겸 마을을 찾을 걸 알기에, 할머니는 오는지 안 오는지도 모르는 이들을 먹일 것이 부족할까 조바심을 내곤했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두 팔을 가득 펼칠 만큼 큰 댕댕이나무 채반에 적감을 한가득 해서 세 채반, 네 채반 끝도 없이 꿰고 부쳤다. 코로나로 명절에 찾아오는 일이 실례처럼 여겨지고 나서는 서운해 하면서 한두 채반으로 줄이기는 했지만, 식혜며 시루떡이며 줄인다 줄인다 하고 하나도 줄지 않는 음식 장만이 이어졌다.
추석 음식 장만은 추석 열흘 전부터 장을 퍼 놓고, 채소를 다듬고 김치를 담고, 시루떡에 올릴 팥을 가리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하도 어릴 때부터 할머니와 추석 장만을 하다 보니 뉴스에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며느리도 되어 본 적이 없는데 명절증후군이 생길 것 같다’며 푸념을 하곤 했다.
추석 음식 장만은 한해 농사지은 모든 것들이 담긴다. 채반 한가득 전을 부치곤했다. 사진_배이슬
명절은 할머니의 레시피와 인연들을 전수받는 시간
지나고 보면 명절음식 장만하는 그 시간이 할머니의 마음을 배우는 가장 귀한 시간이었다. 팥을 가리고 울쿼 삶아낼 때 쓰지 않게 여러 번 물을 갈고 세심하게 삶아 적당한 팥고물이 되게 하면서 작은아들 먹을 시루떡을 생각하고, 호박고지에 고사리를 곱게 기피한 들깻가루 풀어 지질 때면 다른 것 없이 호박고지만으로도 밥 잘 먹는 큰아들을 생각했다.
오지 않을지 모르는 할머니 젊을 적에 머슴살다 나갔다는 어느 아저씨를 생각해 돼지고기 김치전을 넉넉히 부치고, 손이 많이 가니 말자는데도 떡 좋아하는 조카들을 생각해 송편 빚을 쌀가루는 늘 넉넉히 빵궈 왔다.
쌀알을 동동 뜨게 하는 식혜, 보슬보슬 팥시루떡, 쓴맛이 나지 않게 지진 도라지 나물, 누구나 먹으면 어찌 만들었냐고 묻는 할머니만의 비밀 레시피 초무침까지 명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공들여 온 할머니의 레시피를 전수받는 시간이었다. 그 마음까지 말이다.
할머니는 큰아들 좋아하는 나물을 지지고, 오랜동안 보지 못했던 손이 올까 좋아라 하던 전을 부러 부쳤다. 사진_배이슬
추석 열흘 전부터 준비한 음식들로 명절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 없이 오고 가는 손님들 상을 차리고 치우기를 수십 번은 했다. 그렇게 온 손들을 맞는 할머니는 어느 때보다 행복해 했다. 그렇게 할머니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에게 할머니가 한 음식을 먹일 수 있다는 것에 말이다. 친척뿐만이 아니라 마을에 살았던 다른 집 아이들부터 아주 오래전 이웃 살았다는 사람들까지 어쩌다 마을을 들르면 그간 안 본 세월이 몇 십 년이 되었든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을 할머니는 감사해 했다.
먹을 것이 흔하디 흔해진 요즘에야 먹을거리에 담긴 의미와 마음이 전 같지 않을 수 있지만, 명절이면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전을 부치며 할머니에게 듣는 살아온 이야기들 덕에 나는 본 적도 없던 그 인연들에게 음식을 나누며, 받아서가 아니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한 것을 배웠다. 할머니는 그래서 농사를 짓는구나. 나누는 게 행복해서라고 말이다.

추분의 농살림
추분이 오면서 벼꽃이 진 이삭자리에 쌀이 차오르고, 무거워져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볍씨가 단단히 들기 시작하면 논에 물을 뗄 준비를 한다. 곧 벼를 베는 때가 온다. 진안은 추석 전에 베기에는 아직 이르다. 일찍이 심은 호박은 영글어 수확을 앞두고 있고 메주콩도 꼬투리가 차기 시작한다.
콩 꼬투리마다 붙은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들이 빨대 같은 주둥이를 꽂고 차오를 콩을 쪽쪽 빨아먹는다. 일찍 맺는 녹두를 가상에 심어 놓으면 콩보다 녹두를 먹으러 간다는데, 노린재가 워낙 많으니 올해도 콩 농사는 녹록지 않다.
벼베기를 준비하고 은행잎이 물들면 마늘밭을 다룰 준비를 한다. 할머니와 하던 것처럼, 아이들과 은행잎을 모아 황금빛 밭을 만들 준비를 한다. 그리고 메주콩이 들면 톱다리개미허리노린재가 먼저 맛을 본다. 콩농사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떡호박이 일찍 익었다. 잘 쪼개 말렸다가 떡을 만든다. 사진_배이슬
밭을 뒤덮을 만큼 번져나간 고구마 순도 지금이 먹기 좋은 때다 추위가 더 들면 뻣뻣해지기 때문이다. 고구마 잎을 똑똑 따서 껍질을 벗겨내서 나물로 무쳐 먹거나 김치도 담궈 먹는다. 어릴 때 먹었던 물고구마는 덜 달지만 생으로 먹기 좋고 고구마 순이 연해서 껍질을 벗기지 않고 먹을 수 있다.
참깨는 베어 말려 털고 들깨는 꽃숭어리가 연하게 열리기 시작한다. 낮의 길이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이때 숭어리가 맺히지 않은 깻순을 따서 무쳐 먹고, 맨 아랫 잎에 추위가 든 들깻잎도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차곡차곡 따다 지지거나 장아찌를 담는다.
김장에 쓰일 채소들은 부쩍 자라기 시작하고, 수수, 팥, 동부들은 거두어 들인다. 이맘때는 들과 밭뿐만 아니라 산에서도 먹을 것이 많다. 할머니는 동생이 벌초해 둔 뒷산에 바쁜 틈을 내어 떨어지는 조선밤을 주워 모았다. 봄에는 고사리를 핑계로 가을에는 밤을 핑계로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셨다.
동부와 뒤늦게 익어가는 토마토와 단맛이 든 가지를 거두어 들이고, 깻순과 고구마순도 부지런히 따다 먹는다. 사진_배이슬
부지런한 마을 분들은 도토리를 주워 보아 일일이 까고 갈아 묵 만들 준비를 하고, 마을에서 유일하게 산속 깊은 곳을 속속들이 아는 마을 할아버지는 이맘때면 야생버섯을 가득 따다 나눠 주곤 하셨다. 주황빛 싸리버섯은 향도 식감도 잊을 수 없는 별미였다. 이제는 모두 나이가 들어 산을 타지 않으신다.
겨울 나고 먹을 뿔시금치를 뿌리고, 추위가 더 깊어지기 전에 땅콩, 고구마, 토란을 거둘 준비를 한다. 마늘과 양파도 여름잠을 마치니 은행잎을 주워다 마늘밭, 양파밭을 준비한다. 땅속에서 마늘, 양파를 파먹는 고자리,파리, 구더기의 피해를 줄이려고 은행잎이 지길 기다렸다가 노오랗게 황금빛 밭을 만들어 심었다. 아직 은행잎이 노래지려면 멀었으니 밭 다룰 준비를 미뤄야겠다.
이른 봄에 만날 구근들도 심을 때가 되었다. 난초인지 알고 산에서 캐왔다던 할머니의 수선화를 갈라 심고, 지난 봄 예쁘게 숲밭을 채웠던 튤립의 자구도 옮겨 심는다.
밤이 길어지는 것을 눈치챈 귀뚜라미 소리가 매미 소리를 대신하는 때, 안전하게 가을걷이를 마무리하고 중심을 옮겨 겨울을 채비해야겠다.
연재 보기
소서, 작은 더위의 시작
대서, 염소 뿔이 녹는다는
입추, 벼 크는 소리에 놀라 개 짖는
처서, 모기 입이 삐뚤어지는
식물이 자라는 데는 햇볕과 마찬가지로 달빛도 중요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