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하얀 이슬이 내리는, 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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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5 배이슬
"백로에는 새들의 움직임을 보고 때를 가늠했단다. 백로 직후에는 기러기가 돌아오고 중간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고, 백로의 끝 추분이 올 때면 텃새들이 겨울나기를 위해 먹이를 모은다. 달라지는 기후에 자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며 그들의 지혜를 빌려 추워지는 때를 준비하는 무렵이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분홍빛 까락의 보리벼(위), 검은 까락의 멧돼지찰벼(이영동 선생님의 벼), 진안에 맞아 심은 운광벼 등 고루 심었었다. 처서에 장벼 패듯 큰다더니 다행히 백로 전에 이삭이 패고 있다. 사진_배이슬
하얀 이슬이 내리는 때, 백로
흰 백(白), 이슬 로(露)의 백로는 말 그대로 이슬이 내리는 때라는 뜻이다. 내 더울 것만 같던 시간이 어느새 밤이 되면 이슬점 아래로 기온이 떨어져 밤이슬이 내린다. 이른 아침 밭에 가는 길에 장화 위로 바짓단이 척척해진다. 해가 뜰 때 햇볕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이슬을 보며 백로가 왔구나! 한다. 입추와 처서를 지나 가을이 완연해지는 때다.
이삭이 늦게 패나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 벼꽃이 진 자리에 이삭의 하얀 물이던 것이 단단해지며 단단히 패기 시작했다. 같은 초록이지만 두터운 가을색을 입은 풀색에 가까운 연두색의 이삭들이 슬슬 달랑거린다. 이르게 심은 배추들은 팔을 가득 벌리고 볕을 받느라 바닥에 붙어 잎을 늘리고, 고추는 어느새 키만큼 자라 열매를 가득 맺었다. 가을 농사 준비와 갈무리로 바빠지기 시작한다.
백로에는 새들의 움직임을 보고 때를 가늠했단다. 백로 직후에는 기러기가 돌아오고 중간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고, 백로의 끝 추분이 올 때면 텃새들이 겨울나기를 위해 먹이를 모은다. 달라지는 기후에 자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며 그들의 지혜를 빌려 추워지는 때를 준비하기 시작하는 때다.
본의 아니게 이름이 ‘이슬’이라서 백로는 괜스레 가깝게 여겨진다. 내내 이슬이라는 이름 때문에 ‘참이슬’이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하도 놀림을 받던 어느 날 아버지께 여쭤본 적이 있다. 일전에 아버지 친구들은 아버지가 워낙 참이슬을 좋아해 딸래니 이름을 그리 지었다 들어온 터라 씩씩대며 물었다.
“아버지 왜 내 이름을 이슬이라고 했어? 맨날 참이슬이라고 놀려. 진짜 참이슬 보고 지었어?”
“이슬이 만물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아니? 아침에 맺힌 이슬로 많은 생명이 자라고 살아가는 거야. 그래서 아침이슬을 보며 이슬처럼 귀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었으면 해서 지은 거야.”
초등학교 무렵, 아버지께 들었을 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중학교 무렵 온갖 놀림에도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해 뜨면 사라지는 이슬이지만, 맺혀 있는 동안, 맺힌 뒤 풀잎을 따라 흘러 생명을 키우는 이슬은 사라진 듯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고 공기 중에 머물고 있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뭐, 지금은 참이슬이라는 별명도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멋진 별명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른 아침 대지를 적시는 이슬이 내리는 때 백로다. 백로쯤의 맑은 날이 농사에 좋다지만, 과해 가뭄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백로에 맺힌 이슬이 한줄기 생명줄이 되면 좋겠다.
벼 이삭이 패었다. 다행이다. 쌀 먹겠다. 사진_배이슬
칠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못 먹어도, 팔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먹는다
올해는 백로가 일찍 들어 ‘칠월 백로’인 때다. 백로의 속담 중에는 ‘칠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못 먹어도, 팔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먹는다’는 말이 있다. 종종 할머니는 “oo이 이르게 들었다"라거나 "OO이 늦게 들었으니 뭔가를 빨리 해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했다. 예를 들어 아직 먼 동지를 그냥 동짓날이라 하면 될 텐데 “올해는 애동지라 팥죽을 안 쒔다.”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24절기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모르면 알 수 없는 말들이다.
대개 24절기는 옛것이라 음력(달의 흐름)으로 생각해 매년 달력의 작은 글씨로 찾는 줄 알지만, 24절기는 매년 거의 같은 날인 양력(해의 흐름)으로 센다. 24절기는 지구 입장에서 해가 지나는 길에서 달라지는 각도를 24개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 위에 태양의 위치를 15도 간격으로 1년을 24개로 나누어 구분한다. 그런 24절기를 달의 시간과 비교했을 때 음력 7월에 백로가 있으면 칠월 백로, 음력 8월에 해당하면 팔월 백로라고 한다. 삶의 시기를 달의 시간으로 보면서 태양의 각도로 계산한 절기를 더해 보다 입체적으로 기후에 맞춰 보완하며 농사를 지어온 지혜다.
백로 때까지도 이삭이 패지 않으면 추워져 버리는 시기에 벼가 충분히 익지 못하는데, 이를 두고 음력 7월에 든 칠월 백로에도 이삭이 패지 않으면 추워지니 벼가 자랄 시간이 부족하다. 그에 비해 팔월에 드는 백로는 절기 진행이 늦은 해이니, 칠월 백로 때 덜 팬 이삭보다는 영글 시간이 조금 더 있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속담으로 ‘팔월 백로 미발은 먹어도 칠월 백로 미발은 못먹는다’, ‘백로 전 미발이면 헛농사’ ‘백로 아침에 팬 벼는 먹고 저녁에 팬 벼는 못 먹는다’ 라는 말이 있다. 완연한 가을의 시작이 밤부터 오니 낮아진 밤 기온에 작물들의 자람새가 달라지고 그것이 우리 먹고사는 일로 연결되는 것을 잘 드러내는 말들이다.
그밖에 ‘팔월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천석을 늘린다’ 하는 아랫지방의 말도 있는데, 추위가 비교적 늦은 남쪽 지방에서는 외려 이삭이 패고 영글 때 비가 오면 벼가 잘 영글어 수확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진안처럼 추위가 빠른 곳은 자칫 비 이후 뚝 떨어지는 기온에 벼가 덜 영글면 쭉정이가 늘 수 있다. 이렇듯 속담 하나도 지역마다 기후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된다.
배추가 양팔을 벌리고 햇볕을 가득 받는다. 사진_배이슬
쌀쌀한 듯 여름이고, 덥다 더워 하는데 가을
이슬이 맺힐 정도니, 밤 기온은 떨어지는데 떨어질 줄 모르는 낮 기온에 일교차가 큰 때다. 감기게 걸리기도 쉽고, 봄 언저리 그랬던 것처럼 반팔에 긴팔을 걸쳐 입고 밭에 갔다가 금새 벗고 땀을 쫄딱 흘리다가 돌아오는 길에 벗어던져 놓았던 긴팔을 찾아 주섬주섬 입는 때다.
큰 일교차는 가을이라는데, 잘 모르겠다가도 밤 온도에 가을이기는 한가하며 헷갈리게 하는 때다. 그 일교차 덕에 작물들은 부쩍 몸만 키우는 게 아니라 단단히 자란다. 여름 작물을 갈무리하고 가을에 수확하거나 겨울을 날 작물들을 준비하고 심는다. 추위를 나는 것, 낮밤의 온도차가 큰 것은 달리 보면 고난이지만 농사를 지으면 고난이 나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온도가 평온하고 알맞아 부쩍부쩍 크기만 하면 좋을 것 같지만, 짧아지는 해와 추워지는 일교차가 없으면 작물은 씨앗을 맺지 못하고, 키만 자라 쉬이 아프고 상한다. 무난하게 잘 자라더라도 추위를 겪어내지 않은 것들은 보관하거나 요리를 해보면 물러서 쉬이 상하고 제맛도 덜하다. 그러니 사람이나 작물이나 일상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고난 덕에 단단해지고 제 꼴과 맛이 드는 것임을 배운다.
고추는 부지런히 따서 말리고, 배추는 밭에 이사를 마쳤다. 양파 씨앗을 심어 모종을 내고, 올 마늘은 심을 때가 되었다. 쪽파 종구는 마른 꼭지를 살짝 잘라 싹이 잘 나오게 해서 배추 사이사이 손가락 3마디가 쑥~ 들어가게 폭폭 꽂아 심는다. 배추 사이에 자라면 쪽파의 알리신 덕에 배추를 좋아하는 곤충들도 덜 오고 배추 사이 빈 곳을 알뜰히 쓸 수 있다. 뿐이랴 김장 때 한번에 수확해서 쓰고 한 켠에 여름에 수확할 것들은 그냥 둔다.
싸릿문 닫고 먹는다는 가을 상추도 씨를 뿌린다. 상추는 낮이 길어지는 여름에 꽃을 피우고, 30도 이상 더워지면 여름잠에 들어 더위에는 싹이 잘 트지 않는다. 백로쯤이니 상추씨를 흩어뿌리면 가을 추위에 향이 짙고 연한 가을 상추를 실컷 먹는다. 여름처럼 일찍 꽃대가 나지 않으니 오히려 오래 먹는다.
김장에 빠질 수 없는 갓도 씨를 뿌리고, 무와 당근도 밭에서 싹을 틔운다. 추위가 들어야 무 싹에도 구멍이 덜 뚫린다. 추위가 드니 지금 달린 풋호박들은 서리 오기 전에 영글어 늙은 호박이 되기에는 시간이 짧지만, 추위 덕에 단맛이 톡톡히 든다. 부지런히 따서 전 부치고 국수 말아먹고 잘 널어 말린다. 겨울을 날 시금치, 양파, 마늘, 밀, 보리도 놓치지 않고 심을 궁리를 한다. 백로와 추분 동안 겨울 나는 작물을 심지 못하면 이듬해 2~3월에 밭이 얼마나 쓸쓸한지 모른다.
백로의 농살림
일찍 심은 오이가 늙었다. 우둘투둘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고 누렇게 익은 커다란 늙은 오이는 이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중간쯤에 달려 잘 영근 늙은 오이(노각)는 따다가 그늘에 2주간 둔다. 과육이 담겨 있던 영양가가 마지막 후숙 과정을 거쳐 씨앗이 더 잘 영근다. 2주 뒤 갈라서 씨앗은 토마토 씨앗을 받듯이 뜨거운 곳에 밀봉한 채로 이틀간 두었다가 씻어내면 훌렁훌렁 잘 벗겨진다. 씨앗을 발라낸 오이 과육은 말캉한 듯 단단하고 간을 한 것처럼 짠 맛과 시큼한 맛이 난다. 어슷 썰어서 무쳐 먹고, 반 가른 채로 쌀겨나 장에 박아 장아찌도 만들어 먹는다.
오이가 누렇게 익었다. 사진_배이슬
가지도 씨앗을 받으려고 아껴 둔 몇 그루는 보라색이었다가 누렇게 익는다. 가지는 다 익으면 단단하게 누런색을 띈다. 가지도 2주 동안 그늘에 두었다가 갈래갈래 갈라서 빨랫줄에 건다. 묵나물 말리듯 씨앗을 받는다. 겨울이 지나고 뜨신 물에 소독할 겸 문지르면 가지씨앗이 분리되어 가라앉는다. 가을은 역시 짙은 누런색이다.
갖가지 가지도 누렇게 익었다. 사진_배이슬
칡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콩과인 칡은 뿌리뿐만이 아니라 잎도 꽃도 먹는다. 자줏빛 꽃은 따다가 피클에 넣기도 하고 술을 담기도 했다. 추위를 알아챈 여름작물들이 부지런히 자라고 영근다.
칡꽃이 화려하게 피었다. 꽃과 잎, 뿌리를 먹고 줄기는 소금물에 삶아 소쿠리를 엮는다. 사진_배이슬
익을락 말락 커다란 호박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쿵! 떨어져 버리면, 풋 호박도 아닌 것이 늙은 호박도 아니고 어쩔까 했는데 부지런히 전 부쳐 먹고 썰어 말렸다. 단맛이 덜하겠지만 떡 찔 때 넣어 먹을 요량이다.
제 무게를이기지 못한 호박이 쿵! 떨어졌다. 아깝지만 덕분에 실컷 호박을 먹는다. 사진_배이슬
고춧가루로 쓸 고추만 부지런히 따는 게 아니라 씨앗 받을 것도 띄엄띄엄 각각 심었던 고추들도 제 꼴대로 잘 난 것만 골라 따서 구분해 말린다. 수비초, 대화초, 음성초, 청룡초, 붕어초, 화천재래초 등등 토종 고추들은 몇몇 종을 빼면 대부분 과피가 아주 얇아 한나절만 말려도 잘 마른다. 가끔 두꺼운 음성초, 화천재래초는 부러 숭덩숭덩 잘라서 말린다. 행여나 습해서 과피에 곰팡이가 피지 않게 잘라 준다.
여러 고추들을 따서 말리고 씨앗도 받는다. 사진_배이슬
숲밭에 번진 엘더베리가 여름에는 꽃으로 즐겁게 해 주더니 그새 따지 않은 몇몇 꽃숭어리는 나발나발 열매를 맺었다. 노린재부터 사마귀까지 신나게 자리를 잡았던데 살짝 시든 것은 두고 탱글한 열매들을 따라 갈무리를 한다. 다른 베리류에 비해 단맛이 많은 것도 알이 굵은 것도 아니지만 면역력에 좋은 약을 쓰이니 생강한 조각 계피 넣고 설탕 넣고 조려 시럽을 만들었다. 일년 내내 그러했지만 유독 거두고 심는 것이 겹치고, 겨울 나기 준비하는 새처럼 먹을거리를 차곡차곡 쟁이는 때다.
엘더베리 열매를 한껏 따다 시럽을 만든다. 사진_배이슬
바짓단에 모인 물이 한 바가지인 때, 척척한 바짓단이 찝찝할 법한데 맑디 맑은 이슬을 한가득 모아오는 것이 기분 좋은 시기다. 백로에 왔으니 본격적인 가을걷이를 채비해야겠다.
영글고 심고 먹고, 일년 내 하는 일이지만 추위 덕에 맛이 드니, 추위를 준비하며 심을 것이 많다. 사진_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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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농가월령가'는 조선 시대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농가에서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할 일을 달의 순서로 읊을 수 있도록 만든 노래이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농꾼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거둘까? 전북 진안의 배이슬 농꾼은 "24절기는 해의 시간, 달의 시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시기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올 한 해 절기마다 그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연재 보기
⑪ 소서, 작은 더위의 시작
⑫ 대서, 염소 뿔이 녹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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