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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찬 이슬에 곡식 영그는, 한로


2025-10-10 배이슬

"한로에는 볍씨에서부터 시작된 벼농사를 마무리한다. 잘 영글었다고 내버려 두었다가는 너무 영글어서 쌀에 금이 가면 밥맛이 줄어드니 제때에 벼를 거두는 일이 가장 어렵다. 콤바인 들어갈 자리 귀퉁이를 낫으로 베고 기계가 빠지지 않고 나락이 마저 영글도록 물을 뗀다. 그러고도 옆 동네까지 통틀어도 한두 집밖에 없는 콤바인 있는 집에 나락 벨 날을 잡자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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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들판의 색이 바뀌었다. 찬 이슬이 내리는 때가 되었다. 사진_배이슬
들판의 색이 바뀌었다. 찬 이슬이 내리는 때가 되었다. 사진_배이슬

찬 이슬이 내리는 때, 한로


한로는 찰 한(寒), 이슬 로(露)로 차가운 이슬이 내린다는 뜻이다. 이미 백로부터 하얗게 이슬이 내리기 시작했으니 이제 이슬이 차가워지는 때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더 낮아진 온도에 아침저녁 나절 이슬이 차가워지다, 곧 상강이 오면 얼어 서리가 된다. 그러니 한로는 '이슬이 차가워졌다!'는 말로 곧 '서둘러 거둘 때가 되었다!'와 같은 말이다. 한로와 상강 사이에 거두어 들이지 않으면 쉬이 얼거나 상해 보관이 어려워진다. 한로가 지나는데 여적 날은 뜨거워 거두어들이는 손이 멈칫하게 되지만, 어정쩡한 날씨 사이로 금세 깜짝 놀랄 만치 서리가 오게 될 것이다.


어릴 때는 추석과 명절 장보기를 하러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면 차례 상 올릴 조기며 고기를 사고, 방앗간에 쌀가루를 맡기고 나서, 추석을 맞이로 옷 가게에 갔다. 일 년에 딱 두 번 설빔, 추석빔을 해 입었다. 반팔이야 작아져도 입을 만했는데, 추석 즈음 날이 추워지니 여름 사이 부쩍 자란 탓에 소매가 짤통해지곤 했다. 그렇게 추석이 되면 지금은 사라진 시장 골목골목 사이 옷 가게에 할머니는 손주들 내복과 옷을 사입히느라 바빴다. 톡톡하니 두텁고 긴팔옷에 골덴 긴바지를 골라 제 키보다 반 뼘쯤 긴 소맷부리를 접어 입히시던 기억이 난다.


작년부터 유독 더워진 기후에 사람들은 한로에도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다. 밤낮의 기온차로 영글던 것들이 추워지며 맛이 더해지는 때지만, 이제 한로가 오는데도 날이 더우니 영그는 것이 더딘 것도, 병이 드는 것도 있다. 뿐이랴 가을비는 빗자루로도 막는다 했는데, 벼가 잘 영글라고 물을 떼야 하는 시기에 긴 가을비는 도로 논을 적신다. 분명 낮이 짧아져 가고, 밤 사이 이슬은 차가워지는데 가을의 끄트머리인 한로와 상강에 가을을 더듬어 찾는다.

     

기러기 돌아오고 제비는 떠나는 때


한로는 이슬이 차가워진다는 말속에 이제 가을의 끝에 겨울이 온다는 것을 담고 있다. 그래서 한로가 있는 음력 9월에는 기러기가 돌아와 머문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한로가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 따뜻한 기후에 사는 철새들이 떠나는 때로 한로는 기후가 추워지는 때다. 삼짇날 돌아온 제비는 한로가 지나면서 급격하게 추워져 다시 남쪽으로 간다.


그밖에도 ‘한로 지나면 비에도 얼음이 진다’라거나 ‘가을 곡식은 찬 이슬에 영근다’거나 ‘한로에 옷 얇게 입으면 며칠 춥다’처럼 한로를 기점으로 날이 추워진다고 이야기하는 속담이 많다. 따라서 한로는 더운 시간을 살던 작물들은 부지런히 씨앗을 남기고 겨울잠을 준비하고,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은 밭으로 갈 시간이다. 농부는 언제나처럼 심고 거두고 돌보느라 바쁘지만, 1년간 애쓴 것들을 거두고 이듬해를 위해 심느라 가장 바쁜 때다. ‘한로에 겉보리 간다’는 벼베기와 동시에 겨울날 이모작 작물로 보리와 밀을 심을 때가 되었다고 재촉하는 말이다.


벼 베기와 타작


 차근차근 영그는 곡식을 거둔다. 반팔을 여적 입어도 나락은 아침저녁 추위와 짧아지는 해로 영글었다. 고작 2주 사이 들판의 색이 달라졌다. 초록이 많은 노랑색이었다면 이제 언제 초록이었냐는 듯 햇볕에 반짝이는 눈부신 노랑이 되었다. 잘 영근 벼에 긴 비가 내려 전에 없이 태풍 피해도 아닌데 뒤늦게 나락이 누운 곳이 있다. 가을비가 여름장마처럼 오고 논에 물을 떼고도 논이 질은 탓이다. 나락은 용케 여물어 고개를 숙이고 콩 꼬투리가 달린다.

2주 사이 초록이던 벼가 눈부신 노랑이 되었다. 사진_배이슬


한로에는 볍씨에서부터 시작된 벼농사를 마무리한다. 잘 영글었다고 내버려 두었다가는 너무 영글어서 쌀에 금이 가면 밥맛이 줄어드니 제때에 벼를 거두는 일이 가장 어렵다. 콤바인 들어갈 자리 귀퉁이를 낫으로 베고 기계가 빠지지 않고 나락이 마저 영글도록 물을 뗀다. 그러고도 옆 동네까지 통틀어도 한두 집밖에 없는 콤바인 있는 집에 나락 벨 날을 잡자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영근 벼들을 벨 준비를 하느라 모두 분주하다.

벼에서 쌀로, 쌀이 밥으로 되는 과정을 아는 것이 오늘 나의 밥이 내가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볍씨에서 벼로, 벼에서 쌀로, 그렇게 밥이 되는 과정에서 벼는 버려지는 것이 하나 없다. 사진_배이슬


벼를 베며 메주 묶을 볏짚을 일부 두고는 모두 썰어서 논을 덮는다. 논에서 온 것들을 논으로 돌려보내야 내년에도 논은 벼를 키울 힘이 나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부분 논을 먹이기보다 소를 먹이느라 벼 베는 가을 논에는 커다란 공룡알 같은 볏짚 묶은 것들이 자리에 남는다. 유기농 볏짚이니 팔면 돈이 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 돈이 되고 소밥이 되기 전에 논에게 가야 함께 농사지은 논생물들이 겨울을 나고, 내년 나를 먹을 쌀이 되는 것이 더 귀하다.

추석이 지나고서야 햅쌀을 찧고 씻나락을 말린다. 사진_배이슬


벼 베기 전 논에 밀이나 겉보리를 흩어 뿌리 이모작을 준비하기도 하는데, 진안은 아무리 날이 풀렸다 해도 이듬해 여름에 때 맞춰 거두고 벼를 심는 것이 어려워 한두 해 하고는 논에 보리 파종을 포기했다. 그러나 잘 영근 벼 사이로 보리와 밀을 흩어 뿌리면, 벼를 베며 콤바인이 밟고, 볏짚을 덮으면 벼 그루터기들 사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트는 밀과 보리를 만날 수 있다. 이른 봄 초록초록한 논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전처럼 겉보리와 밀로 누룩과 엿기름을 자급하던 때가 아니라 욕심을 내려놓았다.

벼 베기 전 뿌린 밀과 보리에 싹이 난다. 사진_배이슬
벼 베기 전 뿌린 밀과 보리에 싹이 난다. 사진_배이슬

한로의 농살림


상강이 오기 전에 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을 부지런히 거둔다. 추위에 유독 약한 토란은 추위가 들면 뿌리와 토란대를 거둔다.


감자를 캘 무렵처럼 고구마도 캐는 때를 맞추느라 하늘과 눈치 싸움을 한다. 할머니는 날이 추워져야 고구마가 맛이 든다고 했다. 찬찬히 날을 살펴 추워지면 거둬야 하는데 연일 비 소식에 고구마 캐는 날을 정하기 쉽지 않다. 고구마는 특히 자라는 동안에는 멧돼지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큰 탈 없이 자라는 작물인데, 서리를 맞고 캐거나, 보관하는 동안 추우면 쉬이 병이 든다. 날이 따수우니 땅콩도 덜 들어 여적 꽃이 핀 것도 있는데 더 두었다가는 서리를 맞으니 부러 캐어 말렸다가 가린다.

고구마도 캐는 때를 맞추느라 하늘과 눈치 싸움을 한다. 사진_배이슬


콩은 여적 푸릇하고 꼬투리가 덜 영글었다. 영글기도 전에 노린재가 먹고 고라니가 먹어서 든 것이 별로 없다. 콩은 1년 내내 심을 때는 산비둘기 모르게 심는다고 애쓰고, 자라는 동안에는 고라니 쫓는다고 별별 짓을 다해보고, 꼬투리 맺힐 때는 노린재 쫓는다고 꽃도 심고, 녹두도 심어 보고, 수확하고 나서는 바구미가 먹을 새라 애를 쓴다. 벌써 여러 해 전부터는 올콩 늦콩 둘 다 날씨가 수상해 메주 쑤기가 어렵다. 여지껏 파릇했던 콩들이 추워진 덕에 단풍이 들었다.


콩잎, 깻잎은 콩과 깨를 거두기 전에 차곡차곡 수확해 1년 먹을거리로 지지고 담는다. 고구마, 호박, 토란처럼 추위에 약한 것들을 거두어 들이고 벼를 베어 씻나락을 널어 말리고서야, 메주콩은 노랗게 잎이 마르면 뽑아 말린다.

콩 농사는 심고 거둘 때까지 애를 쓴다. 노린재를 쫓아 보려고 왜성 코스모스를 함께 심었다. 고라니를 쫓아 보려고 밤새 불을 켜기도 하고 캔과 비닐도 쳐보지만, 효과는 며칠 가지 않는다. 사진_배이슬


가을 초입에 배추와 함께 심은 쪽파가 부지런히 자랐다. 양파와 씨마늘, 튤립과 수선화 같은 추워야 자라는 것들을 부지런히 심을 준비를 한다. 가을 동안 이미 싹이 나는 양파와 마늘을 보면 뒤안에 두어도 때를 아는 작물들은 매년 신기할 따름이다.

뒤안에 있든 창고에 있든 여름잠을 마친 마늘은 벌써 싹이 났다. 사진_배이슬


아직 상강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호박은 더 영글게 두고 보지만, 자칫 가을 농삿일에 때를 놓치면 늙은 호박도 서리를 맞는다. 그러고 나면 긴 겨울 동안 보관 중에 썩을 수 있어 매일 논밭을 지나는 길에 들여다보며 고민한다. 오늘 딸까? 하루만 더 있다 딸까? 하고 말이다.

호박을 오늘 딸까 내일 딸까, 매일 고민하며 쳐다 본다. 사진_배이슬


농사의 시작, 가을


가을은 거두느라 바쁘지만 농사를 시작하는 때다. 부지런히 씨가 될 것들, 생강, 토란, 고구마, 야콘 같은 것들을 썩지 않고 얼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 하우스나 뒤안 곁에 작은 땅굴을 파기도 하고 버리지 않고 모아 둔 스티로폼에 구멍을 내어 햅쌀을 찧고 나온 왕겨를 넣어 사이사이 뿌리 작물을 넣는다. 요즘에야 농촌에는 집집마다 저온저장고가 있어서 박스째 툭 쟁여 놓는다. 이전에는 뒤안에 솜이불을 덮어놓거나 방안에 박스째로 고구마를 쌓아 놓고 함께 자기도 했는데, 점점 습이 많은 가을과 덜 추운 겨울 때문에 할머니와 해 오던 방법으로는 쉬이 상하는 일이 많아 근래 몇 년 사이에는 할머니와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느라 애를 쓰곤 했다.

가장 잘큰 것은 씨고구마하게 갈무리한다. 고구마가 썩거나 얼지 않게 왕겨를 넣어 보관한다. 그렇게 고구마 싹이 또 자란다. 가을은 고구마의 시작이다. 사진_배이슬


뿐이랴 진안은 늘 추석 전에 벼를 베기에는 촉박해서 묵은쌀을 새로 찧어 먹고, 막걸리를 담았다. 햅쌀은 추석이 지나 벼를 베고 씨나락을 마당에 널어 이슬이 가시면 널고 이슬 내리기 전에 모아 덮기를 여러 날했다.

묵은쌀로 가을에 먹을 막걸리를 담는다. 사진_배이슬


이처럼 가을은 내년 농사를 지을 씨앗을 갈무리하고 저장하는 때이자 이른 봄 흙이 건강하고 질지 않도록 낙엽이나 짚을 덮는다. 이 가을 얼마나 부지런히 논밭을 갈무리하는가에 따라 이른 봄 농사가 수월하다. 한로와 상강 사이 가을걷이와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을 두루 심고 나면 숨돌릴 틈 없이 김장을 준비한다.


한해 농사진 것 중 가장 귀하고 잘든 것은 씨할 놈으로 갈무리하고 두 번째로 잘난 것들은 일가친척들에게 먹이고 그러고 나서야 으지짢은 것들부터 농부 입에 들어간다. 농살림에는 이렇다 할 시작과 끝이 없지만, 그럼에도 찬 이슬이 올 무렵에는 논밭에 있던 많은 것들을 집으로 들이는 농사가 시작이다.

농사의 시작 가을, 씨갈무리를 하느라 손이 바쁘다. 사진_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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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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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거두는 때이기도 하지만 농사를 시작하는 때 이기도 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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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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