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원의 노동과 정치 | 민주주의의 역사 = 종교 권력 해체의 역사다
- hpiri2
- 11시간 전
- 4분 분량
2025-12-05 윤효원
종교의 자유라는 신화 뒤에 가려진, 정치적·사상사적 진실. 민주주의는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 권력 해체의 역사다. 스피노자부터 프랑스혁명, 조선시대까지 정교분리의 본질은 시민의 자유를 위해 종교 권력을 정치에서 분리하는 것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교분리 원칙의 재확인이 필요하다.
윤효원 아시아 노사관계 컨설턴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감사 |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지난 기사
들어가며: “민주주의는 종교의 자유에서 출발했다”는 신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종교의 자유”를 떠올린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따라가 보면, 민주주의는 종교의 자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 권력을 정치에서 몰아내는 투쟁, 다시 말해 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억제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초기 민주주의 운동은 종교를 해방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종교가 정치·입법·사법을 지배하던 봉건제 구조를 무너뜨리는 과정이었다. 종교가 억압받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태어나기 위해 종교 권력이 억압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정교분리는 종교를 보호하는 제도가 아니라, 국가를 종교로부터 보호하는 제도였다.
스피노자·홉스·로크 ― “종교는 정치적 자유의 적”
스피노자는 『신학-정치론』에서 종교 권력이 정치 권력을 장악할 경우 필연적으로 시민의 자유가 파괴된다고 보았다. 그의 결론은 매우 현대적이다. 정치적 자유를 지키려면 국가가 종교를 억제해야 한다.
홉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종교적 분파가 국가의 주권을 나누는 순간 내전과 폭정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홉스에게 종교는 신앙 문제가 아니라 공공질서를 파괴하는 정치세력이었다.
로크는 흔히 ‘종교의 관용’을 주장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가톨릭과 무신론을 관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톨릭은 외부 권력(교황)에 충성하기 때문에 시민적 충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초기 근대 사상가들의 관심은 신앙의 자유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위한 종교 권력의 제약이었다.
프랑스혁명과 미국 건국 ― 종교 분리의 폭력적 기원
프랑스혁명은 종교 해방이 아니라 종교 권력 파괴의 혁명이었다. 혁명정부는 ‘성직자 시민헌장’을 제정해 교회를 국가 기구로 편입시켰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종교의 정치적 권위를 해체했다.
미국 건국도 마찬가지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한 것은 ‘신앙생활의 자유’ 이전에, 국가가 특정 종교를 공인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였다. 제퍼슨과 매디슨이 했던 말은 명확하다. “국가는 교회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정교분리는 신앙이 아니라 권력에 관한 문제였다.
베버와 마르크스 ― 종교 권력 해체의 사회학
베버는 근대 국가의 성립을 “정당한 폭력의 독점”으로 설명했다. 중세에서는 성직자가 행정·사법·징세를 장악했지만, 근대국가는 이 권력을 빼앗고 세속적 법·관료제를 구축했다. 종교 권력 해체는 근대국가 탄생의 전제였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단순한 관념 현상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지배 질서의 핵심 장치로 보았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해방도 종교적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했다. 베버와 마르크스 모두 민주주의의 출발점이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 권력의 해체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한국사에서의 정교분리
한국 역사에서도 종교 권력을 해체한 사건들이 민주주의적 공공성을 형성해 왔다. 대표적 사례는 조선 건국기의 불교 권력 해체이다. 고려 말 사원은 토지·노비·세금 면제·재판권까지 독점한 거대한 종교 경제체제였다.
정도전은 이를 국가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종교 권력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불씨잡변』은 종교의 자유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종교 권력을 국가에서 제거하기 위한 정치 철학이었다. 조선의 건국은 종교 해방이 아니라 종교 권력의 정치적 폐기였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사실상 국가 종교가 되었다. 정약용과 북학파는 이를 공공성의 위기라고 보았다. 그들은 초월적 도학이 아니라 백성의 삶과 이성적 행정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주장했다. 정약용의 개혁사상은 종교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종교(도학)의 분리와 제한을 말하는 것이었다.
근대 이후 ― 도덕국가에서 시민국가로
박은식은 조선 후기의 국정 혼란이 성리학이라는 종교적 도덕 교리가 정치 권력과 결탁해 국가 기능이 마비된 데 있다고 보았다. 안창호 또한 도덕을 정치화하는 것은 폭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시기의 개혁은 종교를 정치에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종교적 독단에서 해방시키는 작업이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국가가 특정 종교를 강제한 사건”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형태를 띤 정치 전체주의였다. 여기에 저항한 이들은 단지 신앙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국가가 종교를 이용해 시민의 양심을 통제하는 구조에 반대했다. 이 또한 민주주의적 정교분리 전통의 중요한 유산이다.
한국 현대 정치에서 특정 종교 세력이 정치 권력과 결탁한 사례는 적지 않았다. 군사정권 시절 국가주의와 보수 개신교의 연합, 민주화 이후에도 반복되는 종교계의 정치 동원은 정교분리 원칙이 여전히 위태롭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함석헌과 민중신학은 종교가 권력을 잡는 순간 부패한다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종교가 공공영역에서 도덕적 비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정치 권력과 결합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는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 권력의 해체에서 탄생
정교분리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평등의 문제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동일한 권리를 갖는 체제인데, 종교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시민 간 평등은 깨지고 공공성이 파괴된다. 서구에서도, 한국에서도 민주주의는 종교 해방의 결과가 아니라 종교 권력의 해체라는 정치적 폭력성 위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종교 권력의 정치적 독점은 반드시 견제되어야 한다. 정교분리는 종교가 자유롭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시민이 자유롭기 위한 장치다.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것
요즘 특정 종교 인사가 국가 주요 지위에 오르거나, 종교계의 정치적 발언이 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정치권은 종교계를 동원하려 하고, 종교계는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적 교훈은 언제나 동일하다. 정교분리는 국가를 위한 것이지, 종교를 위한 제도가 아니다. 정교분리는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며,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위한 최소 조건이다.
종교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 하고, 정치가 종교를 동원하려 할 때, 민주주의는 그 순간부터 후퇴한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종교의 자유라는 허울을 넘어 종교 권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실하게 제한하는 원칙의 재확인이다.
맺음말 – 민주주의는 종교 권력의 해체 역사
민주주의는 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 권력의 억제·탄압·해체의 역사를 통해 태어났다. 이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면 한국 민주주의는 동일한 위험을 되풀이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은 종교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권력을 정치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정교분리는 민주주의의 부속 장치가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의 본질이다.


![[사설] 신 보수주의와 영원한 전쟁](https://static.wixstatic.com/media/c15d53_95a5272637264920bae4b91bbd9a3464~mv2.jpg/v1/fill/w_980,h_652,al_c,q_85,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c15d53_95a5272637264920bae4b91bbd9a3464~mv2.jp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