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 | 대한민국 식량의 미래, 지금 놓치면 다시 설계할 기회조차 없어져
- Dhandhan Kim
- 4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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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1일 전
2025-12-03 김복연 기자
한국 농업은 오랫동안 농민 보호 중심으로 이해되면서 산업적 기반과 식량 안보 체계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왔다. 기후위기가 본격화되면서 사과 일소 피해, 배추·무 병해 확산, 벼 등숙률 저하 등 구조적 취약성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정밀농업이 해법처럼 보이지만 규모, 기술 기업 생태계, 데이터 인프라 등 필수 기반이 부족해 작동하기 어렵다. 고령화와 휴경지 증가로 생산 기반이 빠르게 축소되는 가운데 규모화를 중심으로 한 구조 재편이 시급하다. 지금 이 기반을 마련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는 식량 시스템을 다시 설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위원. 전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탄소중립위원회 위원 및 농림식품과학기술위원회 위원. 농촌진흥청 연구자를 거쳐 농업기술실용화재단에서 실장을 지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아시아개발은행(ADB) 사업에 다수 참여한 농업 공적개발원조(ODA) 전문가로 개발도상국의 식량 안보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농촌개발사업을 기획했고, IPCC 제4차 보고서 승인 회의와 유엔기후변화협약 회의에 한국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식량 위기, 식량 대란, 식량 주권의 문제를 ‘휘발성 이슈’로 소비되지 않게 노력하며, 여러 전문가와 함께 한국의 식량 안보와 지속가능한 농업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유튜브 채널 ‘농업지식채널 짓다’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식량의 미래』, 『식량위기 대한민국』, 『기후대란』, 『대전환 시대 농정혁신의 길』(공저) 등이 있다.
식량 안보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한국 사회는 농업을 아직도 농민의 생계 문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떨어질 때마다 논의는 유통 구조나 농가 소득으로 귀결되고, 농업이 국가의 식량 안보 체계를 구성하는 산업이라는 점은 뒤로 밀린다. 이러한 인식의 축소는 구조적 문제를 식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농업 정책을 생계 지원 중심 논리로 한정한다. 그 결과 생산 기반은 약화되고 산업 구조 형성은 정체되며 기후위기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조정 능력을 잃게 된다.
식량 안보는 단순한 비축이나 수입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농사짓는 주체, 토지 구조, 기술 인프라, 품종 전환 속도, 농업 기업 생태계, 생산 규모 같은 기초적 기반이 유지될 때만 작동한다. 그러나 농업을 특정 집단의 생계 문제로 다루는 담론 구조에서는 이러한 기반을 마련할 수 없다. 농업이 보호의 대상이 되는 순간 산업적 설계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리고, 결국 식량 안보 체계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은 채 유지된다. 지금의 위기는 이 오래된 오해의 결과다.
보호 구조로는 식량 안보를 설계할 수 없다
한국 농업정책의 다층적 목표 가운데 산업화, 경쟁력 강화, 기술 도입은 늘 명목적으로만 존재해 왔다. 실제 정책 운영에서는 농민 보호가 중심에 놓였고, 산업으로서의 농업은 제도적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보호 구조는 농민의 생계 안정에는 기여했지만, 산업 기반을 구축하는 데는 결정적 한계를 드러냈다.

과수·채소·곡물 대부분이 소규모·고령 농가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농장주의 평균 연령은 이미 70세에 달한다. 농가 인구의 고령화율은 56%에 이르고 휴경지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고령화 문제가 아니라 식량 생산 기반의 붕괴를 의미한다. 규모 기반이 약화되면 기술 도입, 품종 전환, 재배지 이전, 기후 대응 설비 구축 같은 전략적 선택은 불가능해진다.식량 안보는 산업적 기반이 존재할 때만 논할 수 있지만, 한국 농업은 이 기반 자체를 취약해진 상태에서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
기후 충격은 이미 구조를 흔들고 있다

기후위기는 농업에서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최근의 기후 패턴은 과거의 변동성과 성격이 다르다. 겨울철 고온 이후 갑작스러운 한파가 찾아오면 꽃눈 형성 과정이 망가지고, 봄철 조기 개화와 냉해가 반복되면 과수 생산량은 안정성을 상실한다. 여름철에는 고온과 높은 야간 기온이 등숙(열매·종자·알곡이 성숙해 내부에 전분 등 영양을 축적하는 최종 과정)을 방해하고, 폭염과 강한 일사로 인해 과실 표면이 타는 일소(강한 햇빛을 오래 받아 식물의 잎·과실·줄기 조직에 이상이 생기는 고온장해)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
사과 과수원에서 일소 피해가 반복되면서 일부 농가는 차양막, 차광 커튼, 미세 분무 장치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냉각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과실이 변색 또는 기형과의 출현 등으로 상품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다. 그러나 이러한 설비는 고가이며, 소규모·고령 농가 구조에서는 도입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는 기후위기 대응이 기술 문제가 아니라 농업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일부 작물은 이제 재배지 자체를 옮겨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기존보다 더 높은 고도, 더 북쪽의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연구와 현장 체감이 늘고 있다. 프랑스 일부 포도밭은 이미 차양 구조와 냉각 시스템을 결합해 고온기에 과실 온도를 낮추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러한 대응은 재배지가 더 이상 안정된 생육 조건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한 조치다. 한국에서도 동일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지만, 이를 농가 단위에서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기후 충격은 단기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조건의 변화이며, 이 변화를 감당할 기반은 이미 충분하지 않다.
추상적 기술 논의가 아닌 구조적 전제가 필요하다
정밀농업은 기후위기 시대의 필수 전략으로 논의되지만, 실제로는 기술 자체보다 이를 작동시키기 위한 구조적 전제가 먼저 필요하다. 정밀농업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분·양분·환경을 제어해 생육을 최적화하는 방식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시스템의 작동 조건이다.
정밀농업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네 가지 기반이 필요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농지, 기술 기업 생태계, 농가의 지불 능력, 기상·토양·생육·병해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인프라. 현재의 농업 구조에서는 이 네 조건이 모두 부족하다. 농지는 지나치게 분절되어 있어 기술 도입의 경제성이 없으며, 농업 기술 기업은 생태계를 구축하기 전에 대부분 좌초했다. 농가의 지불 능력은 기술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렵고, 데이터 인프라는 기본적인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이 조건에서 정밀농업은 개념상의 대안일 뿐 현실적인 해법이 되기 어렵다.
정밀농업의 핵심은 고도화된 장비가 아니라 그 장비가 작동할 구조다. 구조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술 도입 자체가 새로운 부담으로 작용한다.
구체 사례로 드러나는 구조적 취약성
최근의 농업 현장은 구조적 취약성이 현실화된 사례들로 가득하다. 사과 과수원의 일소 피해는 이미 상수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준이고 이를 막기 위해 미스트 장치, 차양막, 냉각설비까지 투입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설비가 소규모 농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라는 점이다.
배추와 무는 강우 패턴 변화로 인해 병해 발생이 잦아졌고, 가격 폭락과 가격 급등이 반복되고 있다. 폭우 이후 며칠 만에 대규모 병해가 확산되는 경우가 늘고 있고, 이는 단일 농가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공급망의 변동성을 키운다.
벼 재배지에서는 여름철 고온과 높은 야간 온도로 인해 등숙률이 떨어지고 있다. 특정 지역은 폭염으로 수확량이 30% 이상 감소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모두 기후 충격이 이미 일상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한국 농업의 구조가 이러한 충격을 흡수할 여력이 없다는 점을 드러낸다.
다가올 10년의 위험
현재 구조가 유지된다면 향후 10년 동안 농업 기반은 급격히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고령 농가가 급속히 이탈하면서 생산 기반은 빠르게 줄어들고 휴경지는 증가할 것이다. 기술 기업의 생태계가 재건되지 않는다면 정밀농업 기반 기술의 확산은 불가능하며 품종 전환과 재배지 이동 속도도 늦어질 것이다. 기후 충격 빈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지연은 식량 안보 체계를 더 취약하게 만든다.

농업은 1~2년 단위로 개편할 수 있는 산업이 아니다. 최소 10~15년의 계획과 지속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지금의 구조에서는 이를 실행할 기반이 없다. 식량 안보 체계는 생산 기반과 인력 구조가 유지될 때만 성립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 구조는 장기 계획의 전제조건 자체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규모화의 필연성
규모화는 단순히 농지 면적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다. 기술 도입, 생산 효율화, 기후 대응 설비 구축, 품종 전환, 재배지 이동 같은 전략적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는 최소 조건이다. 그러나 한국의 토지 구조는 규모화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농지는 지나치게 조각화되어 있고 농지 집적은 구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규모화 없이는 어떠한 기술도, 어떠한 정책도 근본적 효과를 낼 수 없다.
정밀농업을 비롯한 모든 기후 대응형 농업 전략은 규모 기반에서만 작동한다. 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전제다.
청년 농업인이 핵심 축이 되려면
청년 농업인을 단순히 ‘새로운 농가’로 유치하려는 기존 정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초기 정착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과도한 융자를 떠안게 되고, 기술·토지·설비 접근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독립 경영체로 출발하는 모델은 청년에게 과도한 위험 부담을 안긴다. 오히려 청년이 농업의 핵심 축이 되기 위해서는 규모화된 경영체나 농업 서비스 기업에 창업자 또는 직원으로 진입해 경험을 축적하고, 안정적 수익 기반을 갖춘 뒤 독립하는 단계적 경로가 더 현실적이다.
이러한 경로를 가능하게 하려면 토지 집적과 기술 인프라, 기후 대응형 설비 기반, 품종 전환 프로그램, 농산업 기업과의 연계 플랫폼이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농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는 생태계 속에서 성장하고 전환할 수 있는 경로 설계다.
소비자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
소비자가 가격 변동을 감내하는 것만으로는 식량 시스템을 안정화시킬 수 없다. 식량 안보는 국가적 투자와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소비자는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시스템 개혁을 지지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식량 시스템 개편은 사회 전체의 동의 없이는 실현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다.
미래를 위한 기반
한국 농업의 구조적 취약성은 기후위기라는 외부 충격보다 오래된 내부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구조를 재편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농업을 다시 설계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완전한 재편이 단기간에 가능하지 않더라도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은 준비해야 한다. 식량 시스템을 유지할 조건을 지금 갖추는 것, 그것이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기본적 준비이며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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