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시민의회의 실험 | 한국형 기후민주주의를 향한 다양한 실험들
- Theod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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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 최민욱 기자
기후위기 대응에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기후시민의회’ 실험이 한국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2021년 중앙정부는 2050 탄소중립 전략 수립 과정에서 한때 시민 공론장을 운영했지만, 형식적인 의견 수렴에 그쳤다. 반면 경기도는 전국 최초로 법제화된 기후시민의회를 출범시켜 기후 정책 결정에 시민 참여를 제도화하려는 흐름을 만들었다. 한편 시민사회는 인간 외 존재들의 목소리를 공론장에 포함하는 새로운 방식의 참여 모델을 실험하며 기후 거버넌스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들이 제도적으로 정착하고, 숙의 결과가 정책에 실질적으로 반영되며, 사회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갈피를 못잡는 중앙정부의 기후 공론장
2021년 문재인 정부는 ‘2050 탄소중립위원회’를 출범시키며 탄소중립 전략 수립을 위한 공식 논의 구조를 마련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위원회는 정부 부처와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되어, 시민사회로부터 “이해관계자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기존 에너지·산업 정책에 관여한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면서, 위원회의 독립성과 기후정의 관점의 반영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이에 위원회는 보완책으로 숙의형 시민참여 절차를 도입했다. 산하에 구성된 ‘국민정책참여단’은 성별·연령 등 인구 비례를 고려해 무작위로 선정된 500명의 시민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두 달간의 학습·토론 과정을 거쳐 ‘탄소중립시민회의’를 운영했다. 이는 중앙정부가 주도한 최초의 전국 단위 기후 공론장이었으며, 시민 숙의 민주주의를 정책 설계 과정에 접목하려는 첫 실험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시민회의는 자문 기구 성격에 머물러, 시민 권고안이 위원회의 참고자료로만 활용되었다. 결과물의 채택 여부나 정책 반영 과정은 공개되지 않았고, 제도화 논의도 이어지지 않았다.
2022년 윤석열 정부는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로 재편하며 시민회의를 중단했고, 중앙정부 차원의 기후 숙의 구조는 사실상 사라졌다.
2025년 이재명 정부는 ‘국민주권정부’ 기조 아래 기후시민회의 복원을 결정했다.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는 기존 탄소중립 중심의 의제에서 나아가 기후위기 전반을 다루는 ‘기후시민회의(가칭)’ 출범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시민들이 직접 정책 논의 테이블에 참여해 기후 대응의 방향을 결정하는 구조로, 문재인 정부 당시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다.
정부는 단순한 참여 형식이 아닌 실질적 숙의를 구현하기 위해, 시민참여 설계 연구와 국내외 사례 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탄녹위 관계자는 “이번 기후시민회의는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보완하는 수단이 아니라, 시민이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실질적 숙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기후시민단체 역시 투명성·대표성 확보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데이터 공개 및 참여 인선 절차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시민회의의 복원은 중앙정부가 시민 숙의 거버넌스를 다시 제도적 틀 안으로 불러들이는 변화로, 향후 한국형 기후민주주의의 방향을 가늠할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기후시민의회 제도화 해낸 첫 번째 지방정부
경기도는 국내에서 기후위기 대응에 시민 참여를 제도화한 최초의 지방정부다. 2024년,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 수립 과정에서 도민이 직접 참여하는 숙의 공론장을 시범 운영했고, 이를 통해 시민 숙의의 가능성과 과제를 검토했다. 무작위로 선정된 158명의 도민은 에너지, 건물, 수송, 폐기물, 농업 등 5개 분과에 나뉘어 4개월간 계획 초안을 검토하고 정책 제안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행정은 관련 정보와 예산 자료를 투명하게 제공했고, 시민들은 실질적인 검토와 의견 제시를 통해 정책 형성에 참여했다. 이러한 경험은 정보 공유와 권한 위임이 정책 참여의 핵심임을 확인하게 했다.

이 시범 사업을 바탕으로, 경기도는 2025년 1월 전국 최초로 기후시민의회를 법제화했다. ‘경기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조례’에 근거해 공식 숙의기구인 기후도민총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정된 120명의 도민이 총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에너지전환, 기후격차, 자원순환, 기후경제, 도시생태계, 미래세대 등 6개 주제별 워킹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연말까지 기후 정책 과제를 학습하고 숙의한 뒤, 재생에너지 확대, 산업구조 전환 등 도민 체감도가 높은 정책을 발굴해 경기도에 권고할 예정이다. 도는 숙의 결과를 실질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김동연 도지사도 출범식에서 “도민총회의 의견을 집행부와 도의회가 가볍지 않게 다룰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 기후도민총회의 설계는 프랑스와 영국의 시민회의 모델을 참고해 구성되었다. 참가자 모집은 RDD(무작위 전화걸기)와 온라인 지원을 병행했고, 지역·성별·연령·직업 등의 기준을 고려해 대표성을 확보했다. 선발된 시민들은 충분한 학습 기회와 전문가 자문을 제공받으며 숙의에 임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특정 이해관계자의 개입을 배제하면서도 전문성과 민주적 대표성을 조화시키기 위한 설계다.
경기도는 이 제도를 통해 국내 최초로 직접민주주의형 기후 거버넌스를 제도화했다. 기후도민총회는 시민의 의견을 일회성 제안이 아닌 공식 정책 권고안으로 전환하는 구조를 제시하고 있으며, 다른 지자체나 중앙정부로 확산될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향후 이 모델의 성패는 시민 권고안이 정책으로 얼마나 실현되느냐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시민사회가 제안하는 새로운 숙의 모델, ‘사물의 의회’
시민사회는 정부나 지자체의 숙의형 거버넌스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주체 범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는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2025년 개최된 ‘사물의 의회’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기존 인간 중심의 정책 논의 틀을 넘어 기후위기 대응의 정치적 주체를 확장하려는 시도다.

‘사물의 의회’는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가 제안한 개념에 기반한다. 이 실험은 기후위기의 주요 당사자가 인간만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동물, 숲, 해양, 대기, 기술 시스템 등 비인간 존재는 정치적 행위자는 아니지만, 이들의 이해관계를 시민이 대리하여 숙의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책 결정 테이블에 생태계의 목소리를 상징적으로나마 가시화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국내 최초로 열린 이번 사물의 의회는 9월 30일 예비모임을 거쳐, 11월 1일 ~ 2일 양일간 본회의를 진행했다. 사물의 의회는 모의 의회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총 100명의 시민이 인간과 비인간 그룹 각각 5개씩, 총 10개 집단의 ‘외교관’ 역할을 맡았다. 인간 그룹은 기업인, 노동자, 농민, 미래세대, 사회적 약자였고, 비인간 그룹은 대기, 해양, 산림, 동물, 기술이었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대표 집단을 학습한 뒤, 해당 존재의 시점에서 의견을 구성하고, 교차 협상을 통해 최종적으로 10대 기후정책 요구안을 도출했다.
이 실험의 핵심은 기존 시민의회가 전제하는 ‘시민-이해당사자’ 구조를 넘어, 인간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권익과 지속가능성까지 논의의 대상으로 포함했다는 점이다. 참가자들은 비인간 존재가 직면한 위협을 실제 사례와 과학 정보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학습했고, 이를 토대로 자연과 인간 사회의 충돌을 동등한 정치적 사안으로 다루는 구조를 구성했다.
요구안은 국회 기후특별위원회와 정부 부처에 전달되었으며, 시민사회는 이를 정책에 반영할 것을 촉구하는 후속 활동을 전개 중이다. 비록 법적 권한은 없지만, 사물의 의회는 기후 거버넌스의 의사결정 구조가 누구까지 포함해야 하는지를 묻는 상징적 실험이었다. 특히 향후 공식 기후시민의회가 설계될 때, 인간 외 존재나 미래세대처럼 제도 바깥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포섭할 것인지에 대한 구조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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