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날 풍경ㅣ우리의 1980년대 ③ 화염병과 폭력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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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 5분 분량
2025-10-3 최은
1980년대 내내 무수한 폭력적 집회시위가 있었다. 화염병과 짱돌, 최루탄과 지랄탄, 백골단과 사수대 등 당시 장면을 떠올리면 항상 따라오는 것들이다. 이번 글에서는 화염병과 관련해서 제조, 운반, 진화 과정을 살펴보고 그와 얽힌 뒷이야기도 알아보자.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집회시위는 시민의 자발적, 공개적 의사 표시
오늘날 한국에서 시위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신고제이다. 정해진 곳에서 일정한 인원이 모여서 평화적으로 특정한 요구를 주창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시위다. 민주공화국 체제는 시민의 자발적, 공개적 의사 표시에 대해 그 어떤 제한도 가할 수 없다. 집회시위의 목표가 사회통념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형태로 전개되지 않는 한, 모든 집회시위는 자유롭게 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른바 ‘서부지법 사태’ 당시 시도된 방화와 폭력적인 충돌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2025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유럽과 미국의 시위 후에 흔히 발생하는 난동과 상점 습격을 바라보면서, 혹은 최근 네팔에서 벌어진 일련의 폭력 시위(사태인지, 혁명인지 아직 잘 분간이 안 되는)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아주 낯선 감정들.
평화적 집회시위는 어떻게 '사회적 약속'이 되었을까
그런 감정들 혹은 생경함은 지난 10년간 두 번이나 대통령을 탄핵시키는 대규모 시위가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고 치러졌다는 자부심에 기인한 것이다. 수십만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중집회가 특별한 폭력적 충돌 없이 이뤄졌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에서 우파든, 좌파든, 정상적인 시민들의 집회시위는 평화적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이것을 어기는 순간, 민주공화국 체제의 국가 기제는 용납하지 않을 뿐더러, 시민들의 여론 역시 무조건 부정적이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국민이 특별히 ‘평화적’인 것인가?
내가 보기엔 아마도, 우리가 겪은 80년대 내내, 벌어진 무수한 폭력적 집회시위가 말 그대로 ‘역사적 화상(火傷)’과 같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라 본다. 우리가 던진 그 수많은 화염병과 폭력의 정치학이 원인이 되어 오늘날, 한국의 평화로운 시위가 일상화된 것 아닐까? 우리가 80년대를 연상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장면들, 화염병과 짱돌과 최루탄과 쇠파이프, 페퍼포그와 지랄탄과 백골단과 사수대. 우리 세대에겐 익숙하지만, 이후 세대(아마도 90년대 중반 학번부터는 생경해진) 후배들과 얘기하다 보면 반드시 튀어나오는 질문들이 바로 ‘화염병과 폭력 시위’이다. 이런 이야기는 공식적인 역사책에선 그냥 배경에 불과하거나, ‘나무위키’의 시시콜콜한 일화들과 술자리의 무용담 정도로 취급받기 딱 좋을 뿐이다. 그래서 짓궂지만 웃픈 이야기들을 풀어 보겠다.
핀란드 겨울전쟁에서 쓰인 '몰로토프 칵테일'
먼저, 화염병 이야기. 소위 ‘염병’ 혹은 ‘꽃병’이라고 불리우는 화염병은 80년대 폭력 시위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서구권에서는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해야 통하는데, 1939년, 핀란드의 겨울전쟁 당시, 침공하는 소련군을 향해 던진 데서 기원한다.(몰로토프는 당시 소련의 외무장관이었다) 휘발유와 같은 인화물질을 특정한 유리병에 담아, 심지에 불을 붙여서 던지면, 충격으로 폭발이 일어나는 물건이라는 것이 표준적인 정의다. 재료를 구하기 쉽고, 제조가 간단하며, 의외로 효과가 좋다는 것(?)이 화염병의 강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상화되었던 화염병을 준비하는 것, 운반하는 것, 투척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유리병과 휘발유가 대량으로 필요하다. 보통 애용되는 것은 소주병이었다. 표현이 웃기지만, 그립감이 있고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학생회실이건, 써클방이건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재활용쓰레기 모으듯 수거한다.
2. 사전에 구입한 휘발유를 일정량 채우고, 광목천으로 심지를 삼아 틀어막는다.
3. 준비한 꽃병을 이동시켜서 투척조가 심지에 불을 붙인 후, 몇 번 휘휘 감아 돌려서 유증기가 충분히 올라왔다고 판단한 순간,
4. 던지면 단단한 도로 표면에 부딪친 충격으로 폭발한다.
초현실적인 '농담' 같았던 화염병 제조 장면
물론, 실제로 벌어진 일은 이렇게 쉬운 게 아니다. 위의 순서로 잘 준비해서 던진다고 해서 효과가 기대한 만큼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휘발유로 채운 꽃병은 ‘꽃을 피우지 않는다.’ 이른바 순간 화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급조하는 경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미리 품질 좋은(?) 꽃병을 만들기 위해 시너(보통 ‘신나’라고 부른)를 섞어야 한다. 시너는 일종의 점화제 같은 역할을 한다. 화력을 키우고 빠르게 작용하는, 시너는 페인트 혼합제로 흔히 사용하는 용품이었고, 화공약품 가게를 통해 구입했다.
각 학교마다 이런 작업과 구입을 전담하는 팀이 있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설명에 의하면, 일본식으로 ‘영양분석표’라든지 하는 요상한 이름의 문서 자료가 있었다고 하지만, 대개 구전이나 시범 정도로 간단히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실제로 이 작업실의 풍경을 떠올리면, 초현실적인 농담 같은 것이다. 최고의 지성(어찌되었건 고학력의)을 가진 청년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휘발유와 시너 냄새를 참으면서 슥슥 산처럼 많은 화염병을 제조했다.

학교 앞 술집과 포장마차를 돌며 병 모으기
‘산처럼 많은’이라는 표현처럼, 대규모 군중집회나 가두에서 벌이는 기습시위를 위해 준비하는 물량은 1번처럼 준비할 수 없었다. 최소한 2~3천 병은 기본이고, 많을 경우, 1만 병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다. 재료를 구하는 것도 일이다. 휘발유야 어찌어찌 준비한다 해도, 시너를 구하는 작업을 위해 변두리 부도심이나, 시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병을 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학교 앞 골목식당이나 술집, 포장마차에서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1989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한양대에서 열린 ‘전대협 시위’에서 2~3만 병이 사용된 것을 보고 놀랬는데, 얼마 후 포장마차를 운영하면서 병을 공급해 준 이가 잡혀서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격화되는 화염병 시위에 대한 치안당국의 감시망도 촘촘해졌다. 화공약품상에 대한 일제 조사를 통해, 일정량 이상의 시너를 판매한 경위를 조사한다거나, 대학가 술집과 포장마차의 공병 회수를 감독한다거나 하는 일을 각 대학별 경찰서의 담당 형사들이 하던 시절이다.
불시검문을 피해, 선물용 쇼핑백에 담아 이동
2번과 3번의 준비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심지를 쑤셔 넣고, 마개 닫듯 밀봉하는 일도 선수들이 전담했다. 제대로 밀봉하지 않은 경우, 투척을 위해 돌리다 기름이 샌다거나, 날아가면서 줄줄 흐르기 십상이었다. 그럴 경우, 재수 없으면 투척자 혹은 대열의 다른 사람이 화상을 입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심지어 지나가던 행인이 봉변을 당하게 된다.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다. 교내시위야 큰 문제가 없지만, 가두시위를 조직하자면 부득이하게 시내로 꽃병을 이동시켜야 한다. 80년대 내내,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 거리 곳곳에서 불시검문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꽃병을 이동시킬 수 있는가? 흔하게는 주로 여성 활동가들이 선물용 쇼핑백을 이용한다거나 이동하는 버스 내에서 대기한다거나, 미리 파악한 안전지점에서 은닉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게 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작은 소형 세단이나 화물용 차량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87년 7월 9일, 광화문 시위(이한열군 장례식으로 인해 수십만의 군중이 집결했던)가 그랬다. 하지만 그런 전문적인 준비는 아마추어인 대학생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투척 거리가 나오지 않는 친구들
4번의 투척 과정도 쉽지 않다. 제일 큰 문제가 짱돌을 던지건, 꽃병을 던지건 ‘소녀어깨’를 가진 자의 슬픔이다. 제아무리 던져도 일반적인 투척 거리가 나오지 않는 친구들은 앞사람의 뒤통수에 던지는 꼴이었다. 거기에다, 사전에 대기하고 있던 준비열에 기어이 끼어서 짱돌이나 꽃병을 던지고 싶어했던 친구들도 문제였다. 아마도 의기가 충천해서 그랬던 경우가 많았겠지만, 개중엔 특별한 경험을 얻고 싶어한 친구들이나 일반인도 있었고, 심지어 프락치로 의심될 만한 행동을 하는 이도 있었다.
꽃병의 진화
시간이 흐르면서, 꽃병의 진화도 발생했다. 심지를 종이소재로 한다거나, 인화물질에 특정한 성분을 첨가한다거나, 대·소용량의 병을 사용한다거나. 특히 이공계열의 친구들(공대가 나라를 만든다는 데 동의한다) 중 화학이나 화공학을 전공하던 활동가들이 이런 식의 실험(?)을 했다. 내부에 설탕이나, 등유를 섞어서 끈적거리는 점도를 높이거나, 아예 인 성분을 추가해서 일종의 미니 네이팜을 만든다거나. 89년 후반에 아마 성균관대로 기억되는 활동가들이 실제로 시위에서 이런 병을 던지다가 문제가 된 일도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성냥의 인 성분을 긁어서 작은 솜뭉치로 싸고, 병 안에 집어넣으면, 폭발시 이런 뭉치들이 전경 보호복(충격완화용으로 나무틀을 옷 안에 넣는 경우도 있었다)에 붙어서 잘 꺼지지 않게 된다.
소주댓병으로 부르던 대용량의 경우, 거뜬히 일반 꽃병 7, 8개의 화력을 발휘했지만(페퍼포그를 상대했다는 말이 있지만 과장된 얘기다), 무게 때문에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은 일종의 비상용으로, 가두투쟁에나 활용되었고, 오히려 박카스병과 같이 소형화시켜서 사용하는 방식도 있었다. 당연히 화력은 기대할 수 없었고, 그냥 눈요기 정도였다. 이런저런 꽃병 시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6월항쟁 당시 한국은행 앞 고가(지금은 철거된)에서 아예 박스째 준비한 꽃병 전부에 불을 붙이고 통째로 던진 모습이 기억난다. 아마도 진압 병력에 밀려 이동하던 중, 어찌어찌 발생하게 된 우발적인 상황으로 짐작되는데, 다행히 경찰 측의 특별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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