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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겨울의 시작, 입동


2025-11-14 배이슬

“가면 금방인디 그렇게 가다 말고 서 있다가 가고 험시롱 저녁 늦으면 큰소리 난 게 너 먼저 가거라 가거라 하시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가다 말고 서고 헐 때는 금방 가는데 왜 그런가 싶더니, 인자는 내가 그 짧은 길을 한번에 못 가고 서네. 인자서야 어머니 마음을 알 것다. 세월이 그렇게 가서 인자 내가 어머니보다 늙었네.” 하시며 시어머니를 그리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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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입동 전에 벼를 베었다. 논은 볏짚 이불을 덮었고, 메주 띄울 것, 밭에 덮을 볏집 몇 단을 쟁였다. 사진_배이슬
입동 전에 벼를 베었다. 논은 볏짚 이불을 덮었고, 메주 띄울 것, 밭에 덮을 볏집 몇 단을 쟁였다. 사진_배이슬

겨울이 시작하는 때, 입동


입동은 입춘, 입하, 입추와 같이 설립(立), 겨울 동(冬) 겨울이 시작한다는 뜻이다. 서리가 내리는 가을의 끝 상강에 이어 입동은 본격적인 겨울을 의미한다. 옅게 내리던 서리가 짙어져 된서리가 내리다가, 이제는 물이 얼 정도로 추운 때가 된다.


된서리가 내릴 때 할머니는 ‘되네기’가 왔다고 표현했다. 되네기는 늦가을에 내리는 짙은 서리를 의미했다. 되네기가 오면 초록은 얼어 갈색이 되었다. 되네기에도 썽썽한 것은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인 배추와 시금치, 밀과 보리 등이었다. 아직 초록인 것들도 되네기에 얼었다가 해가 나면 녹기를 반복한다.


입동 즈음에는 이른 아침 밭에 가기가 무서울 만큼 춥다. 물론 한겨울 추위보다야 얕을 추위인데도 따숩던 날 가운데 든 추위는 몇 배로 차게 느껴진다. 꽁꽁 싸매고 밭에 나가면 초록이 완연하던 여름만큼 아름다운 불판을 볼 수 있다. 잎맥과 각각의 모양을 따라 내려앉은 서리가 반짝이고, 해가 뜨기 시작할 무렵 더욱 찬란하게 빛을 내는 들판을 만날 수 있다.


배추가 맛이 드는 것이 눈으로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이른 아침 배추가 얼마나 예쁜지는 이맘때 이르게 움직여야 볼 수 있다. 예년보다 따순 탓에 상강부터 온 추위가 갑작스레 느껴지지만 여전히 전보다 따뜻한 터라 아직 거두지 않은 배추 잎 속에는 여전히 진딧물이 살고 있다.


입춘, 입하, 입추 때처럼 계절이 바뀌었다지만 그 끄트머리와 시작인 때라 온전히 계절을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색으로 추위와 가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선명하게 고운 색으로 단풍이 들면 물이 충분하고 추위가 선명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올해도 단풍색이 덜 고운 것을 보면 가을 내 그렇게 비가 왔음에도 물이 부족하고 추위가 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되네기를 맞고 폭삭 삶아 죽은 호박잎과 주황색으로 알알이 산속에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달린 감을 보면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박덩쿨이 되네기를 맞아 삶아 죽었다. 무와 배추는 되네기에도 썽썽하고 콩대가 마르고 감이 익었다. 사진_배이슬


입동이 지나면 김장도 해야 한다


겨울을 흔히 농한기,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때로 표현하지만, 농촌의 겨울은 벼농사만 한숨 쉬어 간다뿐이지 아주 바쁜 때다. 들판에서 할 일이야 줄어 사람이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일 년 내 거둔 것들을 다음 일 년 먹을 것들로 갈무리하고 다음 해 농사를 준비하는 때라 손과 마음 씀이 가장 바쁠 때다.


입동은 대표적으로 김장을 하는 때다. 입동이 지나면 김장도 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벼도 거두어 찧어 쌀을 내고, 서리 맞은 콩도 베어 타작해야 하고, 내년 씨앗할 것들 가름하느라 바쁘지만 겨울 동안 들판에 없을 온갖 채소를 오래두고 먹을 수 있게 갈무리하는 김장도 해야 하는 때라는 뜻이다.


입동이 지나면 김장도 해야한다. 일년내 먹을거리를 갈무리하는 때다. 사진_배이슬


상강의 글에 썼 듯이 이맘때 김장을 하며 입김이 얼던 때였는데 날이 더워지니 김장이 늦어진다. 날이 덜 추운데 김장을 일찍하면 배추나 무의 맛이 덜 들기도 하고, 이르게 담아 준 김치가 일찍 익어버려 오래 두고 김치를 먹기 어렵다. 그래서 할머니는 배추 겉잎이 깡깡 얼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장을 했다. 요즘에야 집집마다 저온저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있으니 언제고 배추가 크면 덜 추울 때 김장을 해서 차갑게 보관해 둔다. 추위에 천천이 맛이 드는 것은 배추가 밭에 있을 때나 김치가 될 때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 외에도 입동은 추운 시간을 사는 작물들이 밭으로 가는 마지막 때를 의미한다. 그래서 ‘입동 전에 보리는 묻어라’, ‘입동 전 보리씨에 흙먼지만 날려주소’ 같은 속담이 있다. 겨울을 살아야 하는 밀과 보리는 상강 전에 뿌려 입동이 될 즈음에는 뿌리를 내려야 더한 추위가 들기 전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늦더라도 입동까지는 보리를 뿌려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흙먼지만 날려 주소'라는 말은 보리는 정말 깊게 줄뿌림하지 않다고 그 사이 뿌리를 내고 싹을 틔우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서둘러 뿌리기라고 하라는 뜻이다. 이때가 지나면 아무리 추위를 잘 견디는 보리라도 땅이 얼고 물이 얼면 보리의 자람새가 더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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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전에 보리씨에 흙먼지만 날려 주라더니, 싹이 트고 잘 자란다. 이맘때 겉보리 자람새를 보고 여름 농사 풍흉을 가늠했다. 사진_배이슬


그밖에도 입동은 겨울을 채비하는 중요한 기점으로 ‘입동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라거나 ‘입동이 따뜻하면 그해 겨울이 춥다’ 같은 기후를 파악하는 중요한 때로 여긴 속담도 있다.


무 꼬랑지 보고 추위 가늠하기


벼는 수확해 논은 볏짚 이불을 덮고 겨울 날 준비를 하고 배추와 무, 부러 열심히 갈아 둔 갓과 매달아 둔 마늘을 까느라 분주히 김장을 한다. 배추를 통으로 쓱 꺾어서 칼로 베어 식구들이 한 줄로 서서 배추를 날랐다. 날아든 배추를 받아 실을 때면 손끝이 시럽고 꽤나 묵직하다. 그렇게 김장 준비를 하며 가을 채소들을 수확 할 때 줄기를 잡고 흔들흔들 무를 뽑아대면 할머니는 무심하게 겨울이 얼마나 추울지를 가늠하곤 했다.


“아야, 봐봐라, 무 꼬랑지 길게 빠진 것이 겨울이 단단히 추울랑갑다.” 하고 말이다.

“왜? 무꼬랑지가 어떤데?!”

“이렇게 길게 꼬랑지가 늘어진 것보면 모르냐, 겨울에 추울랑게 짚게 뿌리 내린 것이지” 


할머니는 그해 가을에 수확할 때 무 뿌리가 길게 깊에 뻗은 것을 보면 겨우내 자랄 준비를 한 무가 추위를 대비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니 그만큼 더 추울 것이라고 했다. 입동에 겨울 채비를 하면서는 고구마가 얼마나 깊게 들었는지, 무 꼬랑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내내 올겨울 추위를 가늠하는 잣대로 삼았다.


올해는 예년에 비해 추위가 늦은 탓일까 아이들과 심어 둔 무가 아직 살을 덜 붙였다. 집집마다 배추를 절이고 감을 깎아 다느라 바쁘지만 여적 속이 덜 찬 배추와 더 익은 추위를 생각해 김장은 조금 더 늦게 해야겠다.


무 꼬랑지가 깊게 뻗었으면 그해 겨울이 더 춥다. 사진_배이슬


입동의 농살림


겨울이 온다는 입동이지만 겨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니 이제야 완연한 가을이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입동이 지나면 변덕스러운 기온 차로 되네기가 별것 아닐 만큼 큰 추위가 금방 온다. 어느 한날 물이 깡깡 얼고 창에 성에가 끼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다.


그러니 입동 전에는 반드시 보리를 갈고 양파모를 심어 둬야 한다. 물이 얼면 곧 땅이 얼기 시작할 테니 말이다. 심어 둔 씨마늘도 더한 추위 전에 벼를 거두고 난 볏짚으로 단단히 이불을 덮어 준다. 씨앗이 아닌 구근, 영양체로 번식하는 작물은 그만큼 쉽게 얼 수 있으니 충분히 깊게 심고, 추위에 대한 대비도 해야 한다.


할머니는 양파와 마늘을 심으면 볏짚으로 두둑히 덮고서도 하얀 부직포로 한겹 더 이불처럼 덮어 두었다. 진안은 특히나 긴 겨울 동안 몇 번이고 내릴 서리에 잎이 꼬슬러지고 추위가 깊어 속까지 얼 수 있다. 서리는 아주 얇게라도 덮어 직접 맞지 않으면 피해가 덜했다. 그렇게 솜이불도 아니고 얇디 얇은 부직포 한 겹을 겨우내 덮었다가 양파와 마늘이 밀어올려 봉긋해지고, 독한 추위가 제법 가고 나면 벗겨 볕을 쬐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면 모아다 밭에 넣고 갈아 씨마늘을 놓는다. 다른 약을 하지 않으니 그마나 은행잎으로 마늘을 파먹는 괴자리를 줄여 본다. 사진_배이슬


겨울 동안의 작물들에게 볏짚과 부직포로 이불을 덮은 것은 매서운 추위를 막기도 하지만 함께 자라는 풀도 없이 겨울의 가뭄을 대비해 작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수분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볏짚을 덮어 두면 겨울에 두꺼운 눈에 작물이 다치지 않고, 눈이 녹은 물이 볏짚에 머금어 가뭄 동안 천천히 수분을 나누어 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해 시기를 놓쳐 한 해 마늘, 양파를 심지 못했다. 겨울에 받을 걱정할 일도 여름에 수확하는 때를 가늠하느라 노심초사 하지 않아도 되어 신간 편하다 했는데, 처음 알았다. 일 년 내 마늘, 양파를 얼마나 많이 먹고 살고 있었는지, 언제고 뒤안 가서 똑 따다가 쓰던 마늘, 양파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는 일이 얼마나 돈도 손도 많이 드는 일인지 놀랐다. 생각해보니 평생 사먹어 본 일이 별로 없던 것들이었다. 당연하게 편히도 먹어 오던 것이 사실 할머니의 손이 수십, 수백 번 들어 먹던 것임을 알았다.


심어 먹으면 돈도 돈이지만 사러 왔다 가는 기름이며, 냉장 보관하느라 드는 것들이 훨씬 줄어든다. 모든 양을 자급하기 어렵더라도 꼭 심어 거두어야 할 귀한 먹을거리가 마늘과 양파다. 갈색으로 말라버린 콩을 베어 탑처럼 쌓아 서리와 이슬에 덜 젓게 말렸다가 타작하고 나면 방구석 콩 고르기를 해야 메주를 쑤고 띄운다.


된서리 맞기 전에 몽땅 따둔 덜 익은 초록의 고추도 일부는 얼리고 일부는 장아찌를 박고, 고춧잎도 삶아 장아찌고 당고 얼려 둔다. 명절에 내어 무쳐 놓으면 한겨울 고춧잎 나물은 호사를 누리는 것 같다. 무나 당근도 김장을 즈음하여 거두면 뜯어낸 무잎은 빨랫줄에 널어 시래기가 된다.


무와 당근은 얼지 않게 땅을 파 포대자루를 깔고 거꾸로 세워 묻어둔다. 한겨울 눈 속을 해치고 무 하나 당근 하나 꺼내는 일이 버거워 몇 해 전부터는 창고에 넣어 둔다. 전보다 덜 추워서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땅속에 넣어 둔 것보다 잔뿌리와 싹이 빨리 나고 쉬이 썩는다. 땅속에서 묻어 두면 온도차도 적고, 자랄 때와 비슷해서 언제 내도 갓 캔 것 마냥 신선했다.


씨생강, 토란, 씨고구마 얼지 않게 덜 썩게 보관하기 위해 땅을 파서 묻기도 하고 완겨 사이에 넣기도 한다. 사진_배이슬


겨울을 맞이하는 마음


기어이 겨울이 온다. 밭에서 돌아가는 길에 할머니는 걷다 서다 하며 세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할머니는 시어머니와 친 모녀처럼 애틋했단다. 할머니와 내가 걸어 돌아오던 그 길을 젊은 날의 할머니와 시어머니가 걸어올 때의 일을 떠올렸다. 얼마 안 되는 짧은 길인데 시어머니가 자꾸 가다 서다 하며 저녁상 늦으면 일 날 테니 먼저 서둘러 가라고 하셨단다.


할머니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가면 금방인디 그렇게 가다 말고 서 있다가 가고 험시롱 저녁 늦으면 큰소리 난 게 너 먼저 가거라 가거라 하시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가다 말고 서고 헐 때는 금방 가는데 왜 그런가 싶더니, 인자는 내가 그 짧은 길을 한번에 못 가고 서네. 인자서야 어머니 마음을 알 것다. 세월이 그렇게 가서 인자 내가 어머니보다 늙었네.” 하시며 시어머니를 그리워하셨다.


시간이 언제 그렇게 가서 하나도 모르겠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때가 오는지, 할머니는 그렇게 입에 붙은 말로 있어 봐라 지금은 몰라도 아는 때가 온다 하셨다. 아직은 모르겠는 것이 더 많지만, 겨울을 맞으며 매년 더 빨리 오는 것만 같은 겨울을 새삼스레 맞는다. 겨울이 오면 매년 왜? 벌써 또 한해가 갔지? 하고 놀란다.


나락 베고, 씨 갈무리하고, 감 깎고, 콩 타작해서 메주도 쒀야 하는데 농한기일리가. 사진_배이슬


입동, 겨울을 맞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빨리 간다던 세월을 만나는 일이 아닐까. 이제 올해는 3번의 절기, 1달 반 정도의 시간만이 남았다. 입동에 하는 겨울 채비는 올 한 해를 잘 갈무리해 내는 것으로 다음 해를 챙기는 것이다. 입동 지나서도 못 챙긴 씨앗 갈무리며 농기구며 마저 갈무리할 마음을 먹는 때다.


입동이 따뜻하면 그해 겨울이 춥다. 사진_배이슬
입동이 따뜻하면 그해 겨울이 춥다. 사진_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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