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시민의회 실험 | 유럽 기후시민의회의 실험, 지속성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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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6 최민욱 기자
세계 곳곳에서 일반 시민이 기후위기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새로운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기후시민의회’라 불리는 이 제도는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이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숙의한 뒤 권고안을 제시하는 참여 모델이다. 2019년 프랑스와 영국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 국가 단위 기후시민의회가 도입되었고, 시민들은 기존 정부 정책보다 훨씬 과감한 기후 대응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이 실제 정책으로 반영되는 비율은 절반 수준에 그치며, 제도적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이에 따라 일회성 행사를 넘어서 지속 가능한 숙의 민주주의로 정착시키기 위한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유럽 주요국에서 확산된 시민 주도 기후정책 실험
기후시민의회는 기후위기에 대한 민주적 대응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프랑스는 2019년 ‘기후를 위한 시민협약(Convention Citoyenne pour le Climat)’을 출범해, 무작위로 선발된 150명의 시민이 8개월간 숙의한 끝에 149개 권고안을 도출했고, 이 중 146개를 마크롱 대통령이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영국은 2020년 하원 특별위원회 주도로 108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기후의회(Climate Assembly UK)’를 구성해 2050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한 정책 권고안을 같은 해 의회에 제출했다. 아일랜드는 이보다 앞선 2017년, 시민의회에서 기후변화 대응을 주요 의제로 다뤘으며, 이후 기후변화법 개정과 5년 단위 탄소예산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이후 유럽 각국으로 기후시민의회 모델이 확산됐다. 덴마크는 2019년 총선 이후 제정된 기후법에 따라 2020년 첫 시민회의를 구성하고 2년간 총 73개의 권고안을 도출했다. 스페인은 2022년 100명의 시민이 참여한 ‘기후시민회의(Asamblea Ciudadana para el Clima)’에서 5개 분야별로 172개 권고안을 산체스 정부에 제출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국민발의 청원을 계기로 연방정부가 2022년 ‘기후보호 국민회의(Klimarat)’를 조직해 6개월간 논의 끝에 93개 권고를 내놓았다. 독일은 시민단체가 주도한 온라인 시민회의 ‘Bürgerrat Klima’를 통해 160명의 시민이 파리협정 목표 달성 방안을 제안했다. 이 밖에도 핀란드, 룩셈부르크, 스코틀랜드, 스웨덴 등은 각기 다른 규모와 방식으로 기후시민의회를 도입하거나 시범 운영하고 있다.
보다 급진적인 시민의 기후 정책,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민의 제안
시민의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대체로 기존 정부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장기적인 기후대응 정책을 제안하는 경향을 보였다. 덴마크 시민의회는 “육류 생산 축소”, “경제성장보다 1.5℃ 목표 우선” 같은 과감한 권고를 내놓았고, 영국은 다주택자 및 잦은 항공 이용자에 대한 탄소세 부과, SUV 판매 금지 등 직접적인 규제 방안을 제시했다. 프랑스 시민협약이 도출한 149개 권고에는 고속도로 제한속도 하향, 항공노선 감축, 에너지 효율 리모델링 의무화 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권고안이 실제 정책으로 채택되는 비율은 낮았다. 프랑스는, 149개의 정책 제안 중 약 20%만이 원안대로 이행되었고, 절반가량은 수정 후 일부 수용되었으며, 헌법 개정안과 같은 민감한 제안은 의회 논의에서 폐기됐다. 영국 역시 시민 권고안이 정부의 공식 의무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고, 항공세 등 핵심 제안은 즉각 수용되지 않았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로 상당수 권고안이 계획 수립에는 참조되었으나, 구체적인 법제화로 이어진 사례는 드물다.
이러한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정부가 시민 권고 중 정치적 부담이 적은 인센티브성 조치만을 채택하고, 규제 강화나 구조 전환을 요구하는 제안은 회피하거나 보류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기후시민의회가 내놓는 급진적이고 장기적인 제안 상당수는 실현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숙의 민주주의의 딜레마
기후시민의회의 영향력이 제한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제도적 권한 부족이다. 대부분의 기후시민의회는 권고안을 제출하면 역할이 끝나는 자문기구로 설계되어 있으며, 최종 결정권은 정부나 의회에 있다.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시민 권고는 ‘의견’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덴마크 시민의회는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실행 약속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종료되었고, 영국에서도 참여 규모가 작아 민주적 정당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퍼졌다. 시민의회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사회 전반의 여론 형성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소수의 목소리로 치부되거나 정치권의 무관심에 부딪히기 일쑤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민의회와 기존 정치체제 간의 운영 논리 충돌이다. 시민들은 수개월에 걸친 숙의를 통해 장기적이고 구조적 전환을 요구하는 반면, 정부는 선거 주기에 따라 단기 성과와 이해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처럼 ‘장기 대 단기’의 시간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한, 시민의회의 제안은 실질적 정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시민 권고를 단순히 참고사항으로 취급하지 않고, 명확한 운영 권한 부여, 정책 반영 여부에 대한 공식적 약속, 시민사회와의 지속적인 소통 체계 마련 등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프랑스 시민협약은 일부 시민을 입법과정에 참여시키고, 정부 답변을 검증하는 후속 모임을 운영하는 등 제도화 시도를 병행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권고 이행 상황을 감시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지속적 관여와 시민사회 연대는 시민 권고가 정치적 소음 속에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일회성 행사’ 넘어 상설 시민숙의 기구로
대부분의 기후시민의회는 단발성 행사로 운영되어, 논의가 종료되면 해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일회성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숙의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려는 방안으로 ‘상설 시민숙의기구’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벨기에의 오스트벨기엔 지역은 2019년 세계 최초로 상설 시민의회를 도입했다. 이 모델은 정기적으로 무작위로 선발된 시민들이 의제를 논의하며, 필요할 경우 특정 사안을 다룰 임시 시민배심을 소집할 수도 있도록 설계됐다. 상시적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는 권고안을 정리해 의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기후정책 분야에서도 이러한 정례적 시민숙의체의 가능성이 주목받는다. 브뤼셀 지역정부는 2021년부터 기후정책 자문을 위한 상설 시민의회를 운영하며, 시민을 교체해가며 권고안을 지속적으로 수렴하고 있다. 영국 런던의 뉴엄구도 2021년 지방정부 최초로 상설 시민의회를 설치해, 지역 주민이 매년 주요 현안을 심의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화 시도는 시민참여를 이벤트가 아닌 제도적 민주주의의 일부로 정착시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를 제도화하려면 충분한 예산과 행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시민 권고를 존중하고 실질적으로 반영하려는 정치권의 수용 의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의 변화와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
기후시민의회의 권고안이 정책으로 즉시 반영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참여 시민과 사회에 미친 변화는 적지 않다. 특히 참가자들의 인식과 행동 변화는 뚜렷했다. 영국 기후의회 이후 조사에서는 다수의 참가자가 “일상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는 실천을 늘렸다”고 답했으며, 기후위기에 대한 이해도와 위기의식도 크게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시민협약 참가자들도 숙의 과정에서 전문지식을 학습하고, 집단 토론을 통해 기후정책의 복잡한 쟁점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일부 시민은 참여 이후 환경운동가나 지역 정치인으로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개인 차원에 그치지 않고, 시민의회 자체가 새로운 정치 참여 모델로 인식되며 사회적 영향도 확대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시민협약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며 기후정책 논의가 대중화되었고, 지역 단위의 유사한 시민참여 실험으로 이어졌다. 시민의회가 다양한 배경의 시민을 한자리에 모아 대화하게 하는 구조는 사회적 분열을 완화하는 효과도 낳았다. 실제 토론 현장에서는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공통의 이해를 찾는 과정이 관찰되었고, 참가자들 역시 “상대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이런 점에서 기후시민의회는 기후위기 대응을 넘어서, 민주주의 회복의 가능성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사회 갈등을 숙의와 협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험이 축적된다면, 시민참여 숙의는 공론장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기자수첩
2024~2025년, 새롭게 출범된 기후시민의회의 동향
네덜란드: 2025년 초, 네덜란드는 사상 처음으로 전국 단위 기후시민의회(Nationaal Burgerberaad Klimaat)를 출범시켰다.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175명의 시민이 “네덜란드의 식생활·이동·소비 방식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방안”을 주제로 6개월 동안 총 7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정부는 권고안에 대해 6개월 내 공식 답변을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의회도 이를 검토하기로 했다. 최종 보고서는 2025년 12월 1일에 새 의회에 제출될 예정이며, 언론과 시민사회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다만, 2024년 7월에 구성된 연립정부가 2025년 6월 초에 붕괴함에 따라 향후 이행 약속의 실현 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튀르키예 이즈미르: 튀르키예 이즈미르에서는 2025년 9월, 지역 차원의 기후시민의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다. 무작위로 선발된 50명의 시민이 9월부터 11월 초까지 총 5회에 걸쳐 회의를 진행하며, 산불, 가뭄, 해수온 상승 등 지역 기후위기의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시민 권고안은 이즈미르 시정부의 지속가능에너지·기후행동계획(SECAP)에 반영되는 것을 목표로 하며, EU와 UNDP가 재정과 기술을 지원했다. 이는 시민의회 방식을 튀르키예에 최초로 도입한 사례이며, 이즈미르 시장은 “이번 시도가 튀르키예 전역으로 확산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남티롤: 이탈리아 북부 자치주 남티롤(Südtirol)은 2024년 상반기 지방 차원의 기후시민의회(Klimabürgerrat)를 구성해 ‘기후중립 2040 계획’을 재검토했다. 성인 50명과 청소년 6명으로 구성된 시민패널과 함께, 노조·산업계·환경단체 등 75명이 참여한 이해관계자 포럼이 병행되었다. 시민과 이해관계자들은 약 600개의 정책 제안을 도출했고, 최종 보고서는 2024년 6월에 제출되었다. 이후 주정부는 2025년 6월 공식 평가회를 열어 이행 여부를 공개했으며, 54건은 “새롭고 실현 가능”한 제안으로 채택되었고, 263건은 기존 정책에 이미 반영된 조치로 분류되었다. 반면, 103건은 “실현 불가” 판정을 받았고, 124건은 추가 검토 과제로 남았다. 주정부는 이 제안들을 공개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하고, 기후중립 달성까지 시민과의 대화와 점검을 이어갈 방침이다.
캐나다: 2025년, 캐나다 연방 상원의 초당파 모임(Senators for Climate Solutions) 주도로 ‘청년 기후시민의회(CYCA)’가 개최되었다. 18~25세 청년 33명이 선발되어 8월부터 10월까지 4회의 온라인 세션과 9월 17일부터 21일까지 오타와에서 현장회의를 진행했다. 이들은 초당적 기후정책 협력, 청년의 정치 참여 확대, 화석연료 보조금 폐지, 청정에너지 전환 가속화 등의 정책을 권고했다. 특히 기후 불안에 따른 정신건강 지원, 토착 원주민의 권리 및 리더십 존중 등 청년 세대의 특화된 우선순위가 반영되었다. 해당 권고안은 상원 기후해법 의원모임과 하원의 기후코커스를 통해 공식적으로 의회에 제출될 예정이며, 참여 청년들은 이를 대중에도 공개해 사회적 논의를 확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정부 주도의 기구는 아니지만, 입법부 중심의 새로운 숙의 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브라질 및 글로벌 시민의회: 브라질은 2025년 유엔기후총회(COP30)의 의장국으로서, 글로벌 시민의회(Global Assembly for People and Planet)의 출범을 지원하고 있다. 이 상설 기구는 2024년 9월 23일 공식적으로 출범했으며, 전 세계 수천 개의 지역 시민패널을 연결하는 이중 구조로 설계되었다. 시민들은 각국의 지역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도출하고, 이를 글로벌 기후 협상에 연결하는 방식이다. COP 협상장 밖의 독립체로 상설 운영되며, 정치적 변화에 영향받지 않는 영속적 구조를 갖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주최 측은 2030년까지 연간 1천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200여 건의 기존 기후시민의회 경험을 통합해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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