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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⑨ 시민이 다시 헌법을 쓰다 – 1987년 6월 항쟁과 9차 개헌

2025-07-25 박한용

1985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내건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고,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 사건이 벌어져 대중적 분노가 분출했다. 정권은 4월 13일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6월 호헌철폐를 요구하며 전국에서 항쟁했고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 개헌 약속을 받아낸다. 10월 국민투표를 거쳐 9차 개헌이 이뤄졌다. 대통령 직선제 부활, 헌법재판소 신설, 국회의 권한과 사법의 독립도 강화되었다. 윤석열 정권의 비상계엄을 막아 낸 2025년 현재. 우리는 기후위기, 디지털 격차, 인공지능과 데이터 주권 문제에 직면해 있고, 노동과 주거와 젠더 등 새로운 권리의 언어들은 아직 헌법 밖에 놓여 있다. 제10차 개헌에서는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한 공동체 원리로서 헌법을 다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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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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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선제에 갇힌 민주주의의 회복을 향해


1980년 제8차 개헌으로 탄생한 제5공화국 헌법은 7년 단임제를 표방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신체제를 완화한 수준에 머문 통제적 헌법이었다. 가장 큰 불만은 대통령 직선제가 배제된 간접선거제였다. 국민은 더 이상 통일주체국민회의 같은 어용 선출기구를 원치 않았지만, 새로 도입된 대통령선거인단 제도는 이름만 바뀐 또 하나의 거수기였다. 간선제는 민주적 정권교체를 구조적으로 차단했으며, 결국 헌정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선 헌법 개정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 같은 체제 불만은 1985년 2월 총선에서 폭발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내건 신민당이 야당 돌풍을 일으켰다. 이후 이민우 총재는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설치를 요구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요지부동이었다. 전두환은 1986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 논의는 1988년 이후로 미루자는 '개헌 유예론'을 제시하며 시간 끌기에 들어갔고, 정권은 신민당사 봉쇄와 서명 운동 방해 등으로 야당의 개헌 추진을 물리적으로 탄압했다.


국가안전기획부, 보안사령부, 경찰 등 공안기구들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통일운동 등 민주화 세력을 전방위적으로 탄압했고, 수많은 활동가들이 체포되거나 구속되었다. 당시 ‘개헌’은 단순한 제도 논의가 아니라, 압제와 침묵의 시대를 깨뜨릴 유일한 숨통이었다.


‘호헌’이라는 벽에 맞선 분노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은 정권의 실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거짓 해명으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4월경 진상이 밝혀지며 대중적 분노가 폭발했다. 반면 야당은 김영삼, 김대중 두 지도자의 분열로 신민당이 해체되며 정치적 분열을 겪었다.


정권은 이 틈을 타 4월 13일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전두환은 개헌 합의 실패의 책임을 야당에 돌리며, 13대 대선은 기존 헌법에 따라 치르겠다고 일방 선언했다. 이 조치는 사실상 대통령 직선제 논의를 봉쇄했으며, 민의에 정면 도전이었다.


이에 맞서 범야권과 시민사회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고 전국적인 시위를 조직했다.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졌고, 다음 날인 6월 10일 민정당이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동시에 ‘호헌 입장’을 고수하자, 전국의 분노는 한꺼번에 폭발했다.

수백만 시민이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며 전국에서 항거했다.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은 정권의 권위에 결정타를 날렸고, 결국 6월 29일 노태우는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정치개혁을 약속했다. 이는 시민 항쟁의 분명한 승리였으며, 헌법을 되찾는 시민의 외침이 관철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고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_서울역사아카이브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고 이한열 열사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_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주권재민’으로 – 제9차 개헌


6월 항쟁 이후 개헌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여야는 협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안을 마련했고, 1987년 10월 12일 국회를 통과, 같은 달 27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78.2%, 찬성률 93.1%라는 압도적 지지를 받아 가결되었다.


9차 개헌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의 부활이었다. 국민이 권력자를 직접 선택하는 권리가 15년 만에 되살아났고, 긴급조치권은 완전히 폐지되었으며, 헌법재판소가 신설되어 권력에 대한 헌법적 견제가 가능해졌다. 국회의 권한과 사법의 독립성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개헌이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내각책임제 도입은 무산되었고, 대통령 중심제는 유지되었으며, 검찰과 정보기관 개혁, 표현의 자유 보장, 언론의 자율성 확대 등은 이후에도 꾸준한 투쟁의 과제가 되었다. 특히 1987년 여름부터 이어진 노동자 대투쟁과 농민 시위는 헌법 개정이 반드시 시민 전체의 삶을 담보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차 개헌은 시민의 힘으로 쟁취한 헌법이며, 유신체제 이래 최초로 민의가 반영된 헌정질서로서,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개헌 흑역사의 반동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


9차 개헌으로부터 어느덧 38년이 흘렀다. 그 헌법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민국은 이제 스스로를 선진국이라 자부하지만, 헌법은 여전히 1987년에 머물러 있다. 2025년의 우리는 기후위기와 디지털 격차, 인공지능과 데이터 주권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노동·주거·젠더 등 새로운 권리의 언어들은 아직도 헌법 밖에서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불과 6개월 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정권의 독재를 가능케 했던 계엄과 개헌의 ‘흑역사’를 되살리려는 반동을 겪었다.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그 자체로 한국 헌정사에 깊은 충격을 안겼다. 윤석열은 “종북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며, ‘국회와 지방의회 활동 금지, 언론 통제, 집회·파업 금지, 직장으로 복귀하지 않는 전문의에 대한 처단’ 등의 내용을 담은 포고령 제1호를 공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헌의 흑역사를 현재에 되살리려 한 반동적 기도는 시민사회의 목숨 건 계엄군 저지와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안 의결을 통해 좌절되었다. 현재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선고를 받았고, 사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윤석열의 폭거는 과거 박정희의 유신 선포, 전두환의 비상계엄 확대와 닮아 있었으며, 정치적 위기를 계엄령과 개헌으로 돌파하려는 위험한 시도로 비판받았다. 특히 윤석열의 계엄·개헌 프로젝트는 이승만의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 박정희의 유신헌법, 전두환의 광주학살과 5공헌법으로 이어진 반동의 연속을 반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비상계엄을 ‘권력을 위한 방패’로 삼고 개헌을 장기집권 수단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2025년, 다시 묻는다 – 헌법은 누구의 것인가


윤석열 일당이 저지른 내란과 각종 부정부패의 후유증은 매우 크다. 9차 개헌 이후 4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미래적 가치를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과거 독재로 회귀하려는 시대착오적 충동과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개헌을 고민해야 한다.


개헌은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다. 1987년 9차 개헌이 광장의 분노와 연대로 만들어졌듯, 제10차 개헌은 광장의 상상력과 시민의 참여로 완성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개헌은 시대의 과제를 담아낸 사회적 계약의 재구성이지, 구질서의 부활이 아니다. 헌법은 멈춰선 문서가 아니라, 시대마다 새로 써야 할 살아 있는 규범이다.

사진 영화로운형제
사진 영화로운형제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 2025년, 우리는 다시 헌법을 써야 한다. 이번 개헌은 내란의 종식과 민생의 회복, 분열된 가치관의 치유와 왜곡된 사회구조의 재편까지 함께 담아내야 한다. 더 이상 권력의 재편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한 공동체 원리로서 헌법을 다시 써야 한다.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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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7월 28일

개헌 현대사...그동안 잘 읽었습니다. 당면한 10차 개헌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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