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용의 개헌 현대사 | ⑧ 헌법 위에 세운 피의 권력 – 전두환 정권의 8차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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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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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8 박한용
전두환 8차 개헌 역사, 1980년 10월 전두환 정권의 8차 개헌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군부의 권력을 강화한 야만적인 헌법 개정이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힘으로 이를 무력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박한용 | 역사평론가, 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조직운동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순천향대·한성대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교육홍보실장 등을 거쳤다. 주요 논저로 「1920년대 후반 국제반제동맹의 출범과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의 대응」, 『일제강점기 친일세력 연구』(공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공저), 『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변준호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영주독립운동사』(공저),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 2』(공저)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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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만든 신군부의 등기권리증, 8차 개헌(5공개헌)
1980년 10월 27일, 유신헌법이 새로 개정되고 이른바 제5공화국으로 불린 신군부정권이 출범했다. 이름하여 제8차 개헌. 헌법이란 민주공화국의 근간이며, 국가의 방향을 새로이 잡는 중대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개헌은 그 이름과 달리, 국민이 주인이 아닌 개헌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이 헌법을 내세워 제5공화국의 출범을 알렸다. 하지만 헌법의 ‘공화’라는 이름은 민의를 반영하지 못했고, ‘정의’라는 말은 침묵을 강요당한 피의 현장 위에 세워졌다. 이 개헌은 새 질서의 설계가 아니라, 학살과 공포 위에 세운 정권의 ‘피의 등기권리증’이었다.
‘신군부’의 집권 프로젝트, K-공작계획과 비상계엄
1979년 10월 26일, 총성과 함께 박정희가 사라지자 유신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 무너진 자리를 민주주의가 채우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뒤를 이은 것은 탱크와 총검이었다.
그해 12월,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자신들이 군권을 장악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세력은 허울뿐인 최규하 대통령을 사퇴시키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명분이 필요했다. 1980년 2월, 보안사령부는 ‘K-공작계획’이라는 명칭의 비밀 시나리오를 작성해 실행에 옮겼다. 이 계획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필요하다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는 군의 정치 개입을 단순히 합리화하는 차원을 넘어, 체계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치밀한 공작이었다.
5월 초순, 보안사령부는 시국 수습 방안을 명분 삼아 일련의 정치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그 주요 내용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실제 작전도 빠르게 진행됐다. 육군은 ‘충정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군부대를 이동시켰고, 공수부대가 각 지역에 투입될 준비를 마쳤다.
5월 10일,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첩보를 바탕으로 ‘북괴 남침설’을 만들어 냈다. 이는 시국 불안과 안보 위기를 부각시켜 계엄 확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조치였다. 같은 달 12일, 이 보고는 심야 임시 국무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같은 날 신민당과 공화당의 양당 총무가 개헌안을 접수했으며, 국무총리 신현확은 헌법 개정과 개헌 일정을 앞당기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국회를 이용해 헌법 개정을 형식상 추진하는 한편, 실제 권력은 군이 전면에 나서 장악하는 이중의 기획이었다.
5월의 봄에서 피의 5월로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약 10만 명의 시민이 모여 전두환 퇴진을 요구했다. 이날 시위에서 일부 청년이 버스를 탈취해 진입하는 과정에서 전경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시위는 일시적으로 해산되었으나, 민심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5월 17일 밤 12시, 전두환 세력은 마침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했다. 이와 함께 ‘포고령 제10호’가 발효되어 김대중, 김종필, 김상현 등 주요 인사 26명이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되었고, 김영삼은 자택에 가택연금되었다. 이 시기 전국에서 2600여 명이 체포·구금되었으며, 국회는 사실상 봉쇄되었다. 정치의 중심이 마비되고, 시민의 권리는 군홧발 아래 짓밟혔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군은 공포정치를 본격화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 5월 18일. 석가탄신일 아침, 광주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됐다. 전남대생들이 계엄군의 교내 진입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섰고, 곧이어 시민들이 함께했다. 공수부대는 진압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 폭력과 발포를 자행했다. 광주는 그렇게 피로 물들었다. 이 저항은 단순한 지역의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헌법을 유린한 자들에게 맞선, 민주주의를 향한 전국적 봉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일당은 비상계엄 하에 개헌공작을 진척시켰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개헌 돌격
1980년 6월,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고 헌법 개정 작업에 들어간다. 국회는 해산되어 있었고, 정당 활동은 금지된 상황이었다. 헌법을 고치는 일은 법률가도, 국회의원도, 시민도 아닌 군부 인사들이 밀실에서 도맡았다.
8월에 개정안이 확정되었고, 10월 22일 국민투표가 강행됐다. 계엄령이 내려진 나라에서 투표는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라 ‘강제된 수긍’이었다. 찬성률 91.6%, 투표율 95.5%. 숫자만 보면 전례 없는 민주주의의 축제지만, 그 뒤엔 군홧발의 공포가 있었다.
그리고 10월 27일, 전두환은 새 헌법을 공포하며 제5공화국의 시작을 선언했다.
표면만 보면, 유신헌법보다는 나아진 듯했다. 긴급조치권이 빠졌고, 통일주체국민회의도 폐지되었다. 대통령 임기는 6년 중임제에서 7년 단임제로 바뀌었다. 얼핏 보면 권력을 묶는 장치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은 바뀌지 않았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뽑을 수 없었다. 여전히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였다. 견제의 장치도 후퇴했다. 유신헌법 때 법 조항으로만 존재했던 헌법재판소는 없애고, 실질적 권한이 없는 ‘헌법위원회’만 새로 설치되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쓰여 있었지만, ‘필요한 경우 제한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뒤를 따랐다. 즉, ‘개선된 헌법’이라는 외피 아래, 권력의 핵심은 더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무장한 권력은 자신이 정의한 법으로, 자신을 정당화했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통제 헌법
전두환 정권은 이 헌법을 들고 나와 “우리는 유신을 청산했다”고 외쳤다. 하지만 그 주장은 제2의 유신의 시작이었다. 1980년의 헌법은 군부의 계략으로 탄생했고, 시민의 의지는 배제된 채 구성되었다. 8차 개헌은 ‘헌법’이라는 이름을 썼지만, 실제로는 ‘합법의 가면을 쓴 통제도구’였다.
헌법이 공포된 지 불과 열흘 뒤인 1980년 12월 6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간접선거는 8차 개헌으로 도입된 ‘선거인단 간선제’에 따른 것이었지만, 선거인단 자체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조직되고 통제된 구조였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은 매우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8차 개헌은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로 장악한 권력을 헌법의 외피로 덮어 ‘합법화’하는 과정이었으며, 시민의 동의 없이 권력을 등기한 절차에 불과했다.
민주주의는 단지 조문에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들이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때, 헌법은 허상에 불과하다.
끝내 시민이 다시 헌법을 되찾다
그러나 헌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묻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7년 뒤인 1987년, 전두환 정권은 또다시 헌법을 바꾸지 않겠다는 ‘호헌 담화’를 발표하며 정권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다시 일어섰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1987년 전국을 달군 6월 항쟁은 피로 세워진 헌법, 즉 제8차 개헌을 역사 속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쟁취했다. 헌법은 권력자의 것이 아니다. 헌법은 총과 계엄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광장에서, 시민의 손끝에서 태어날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현 시점 마지막 개헌이었던 1987년 9차 개헌은 과연 그러했던가? 다음 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번 제헌절에 이재명대통령과 우원식국회의장은 개헌 메시지를 냈습니다. 지금까지 9차례 개헌 모두 국민이 주도하는 개헌이 아니었던 만큼, 이번 10차 개헌은 국민이 주도하는 개헌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