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벼 크는 소리에 놀라 개 짖는, 입추
- hpiri2
- 8월 8일
- 6분 분량
2025-08-08 배이슬
‘여지없이 입추구나’. 농부가 만나는 입추는, 해가 짤뤄지고, 밤바람 끝에 온도가 다르며, 매미소리가 맹렬해진다. 개도 놀랄 듯이 벼가 훌쩍 자라며, 당근 씨앗 털고 배추 씨앗 넣고 이제 가을 농사를 시작한다. 온몸이 땀범벅인 할머니에게 새참을 내러 논둑과 밭을 가로지르던 여름방학이 생각난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편집자주 농가월령가'는 조선 시대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농가에서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할 일을 달의 순서로 읊을 수 있도록 만든 노래이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농꾼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거둘까? 전북 진안의 배이슬 농꾼은 "24절기는 해의 시간, 달의 시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시기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올 한 해 절기마다 그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연재 보기
⑪ 소서, 작은 더위의 시작
⑫ 대서, 염소 뿔이 녹는다는

가시지 않는 더위지만 오고야 말 가을, 입추
입(설 입, 立), 추(가을, 秋)는 가을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아직 더 더워질 일만 남은 것 같은데 가을의 시작이라니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입하의 급변하던 기후를 떠올려도 8월의 입추는 가을을 느끼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여지없이 입추구나 하고 농부가 만나는 감각이 세 가지 있다.
첫 번째는 ‘해가 짤뤄진다’ 하고 낮의 길이가 달라지는 것이다. 늦도록 일해도 내내 밝을 것 같았는데 ‘해가 일찍 지네?’를 체감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는 밤바람 끝에 온도가 달라진다. 여름에는 해지도록 일하고 집에 오는 길도 솔찬히 더워서 씻고 마루에 누워서야 시원하다. 어느 날 밭에서 오는 길에 습기가 줄어든 시원한 밤바람이 느껴지면 '가을이 오긴 오는구만' 한다. 세 번째는 소리가 달라진다. 여름을 드러내는 매미소리가 맹렬해지면 입추가 가까워져 온 걸 안다. 밤에 찌르륵 하고 열대우림에서 날 것 같던 벌레소리들의 색깔이 묘하게 달라지는 때 가을이 오고 있다.
계절은 낮보다 밤에 먼저 온다. 별의 모양이 달라지고 냄새가 달라진다. 짧디 짧고 오지 않을 것처럼 더워도 가을은 입추에 이미 발자국을 뗐다.
벼 자라는 소리에 놀라 개가 짖는다
입추에는 벼 자라는 소리에 놀라서 개가 짖는다는 속담이 있다. 내내 초록에 키가 좀 컸는지, 새끼를 쳤는지, 슬글슬금 자란다. 크긴 크는 듯한데 매일 봐서 그런가 잘 모르겠다 싶었는데, 입추가 가까워지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벼를 볼 수 있다. 벼를 보면 청각이 좋은 개들한테는 들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쑥쑥 자란다.

따뜻한 기후에 사는 벼에게 덥고 습한 날씨가 도움이 된다. 낮이 짧아지고 여름밤 몰래 찾아든 가을을 알아챈 벼가 서둘러 자라는 게 아닐까. 올해는 늦게 심기도 했고 비가 오느라 흐린 날이 많아 그랬을까? 벼가 키는 쑥쑥 자랐지만 아직 이삭을 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입추가 지날 즈음에는 아주 짧게 찬란히 피고지는 벼꽃이 피는 때다.
안 크는 듯 잎을 키우고 줄기를 늘린 벼가 온 힘을 쏟아 벼 껍질을 먼저 만든다. 살짝 열린 벼 껍질 사이로 달랑달랑 노란 벼꽃이 한여름 낮에 반짝인다. 멈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잠깐 핀다. 그렇게 제 꽃가루를 받고 벼는 껍질을 닫고 차곡차곡 영양분을 모은다. 충분벼이삭히 익기 전까지 초록의 벼 이삭은 말랑하고, 하얀 우유처럼 생긴 액체 상태의 쌀이 차오른다.
꽃가루를 받는 때에는 바람과 곤충의 도움을 받으니 어떤 작물이든 비가 적어야 잘 맺고 영근다. 근래 몰아서 내리는 우렁찬 비로 인해 벼는 어찌 크려나 조바심이 난다. 그래서 입추가 지나고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모낼 때는 비가 안 와 조바심 내며 기우제를 하다가 벼꽃 필 때는 비 안 오게 해 달라고 기청제를 지내는 것이 속없다 싶지만, 농사를 지어본 이는 시대를 떠나 그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다 할 것이다.
찬란하게 반짝 피고 지는 벼꽃, 입추가 지나며 가장 뜨거운 때 아주 작게 핀다. 사진_배이슬
당근 씨앗 털고, 배추 씨앗 넣고, 가을 농사 시작하는 때
입추 즈음이면 본격적인 가을 농사를 시작한다. 봄, 여름내 농사지어 놓고 농사를 또 시작한다니 기가 차지만, 일 년 농사는 그렇게 시작에 시작을 더해가야 우르르 끝이 몰려 오는 일이다. 10년이 넘도록 농사를 지으며 “농한기 농번기란 말은 누가 지었을까? 계속 바쁜데?!” 한다. 가을 농사는 가을 끝과 겨울에 거두거나 해를 넘겨 거둘 것들을 살피고 심는 때를 뜻한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농사의 시작은 가을이다. 내년에 이르게 모종 내서 심을 밭이라면 양파 마늘을 심으면 안 될 테고 그 밭의 크기에 맞춰 배추, 양파 모종을 내기 시작하는 게 이 즈음이다.
또한 여름의 기세에 가을을 알아차린 작물들이 열매를 쏟아내기 바쁜 때다. 부지런히 먹으며 내년 농사에 쓰일 온갖 씨앗을 받아야 하는 때다. 하얗게 피었던 꽃은 갈색으로 말라 슬슬 손으로 부비면 벌레처럼 다리가 많고 작은 당근 씨앗들이 떨어진다. 이때 거둔 당근 씨앗을 8월에 심으면 겨울이 오기 전에 맛과 색이 더 잘드는 가을 당근을 먹을 수 있다.
하얗게 피었던 당근꽃은 갈색의 씨앗이 되었다. 가을당근이 맛과 색이 더 잘든다. 사진_배이슬
근래에 한참 날이 뜨겁다가 비가 몰아쳐 내리기를 반복하는 통에 밭에 토마토들은 쩍쩍 갈라지거나 배꼽이 썩는 등 병이 난다. 뿌리가 썩어 마르지 않으면 다음 꽃자리 그 다음 꽃자리 차례로 열려 익어대는 통에 가득 열리는 토마토들, 밭을 기어 열리기 시작하는 참외도 익기가 무섭게 무르기 쉽다. 특히 이렇게 급변할 때는 더욱 신경 써서 씨앗 먼저 챙겨 받는다.
여러 토마토들의 씨앗을 단디 받는다. 바람치는 그늘인 마루가에 씨앗들이 가득 자리한다. 사진_배이슬
가장 탐스럽게 제 색깔을 드러낸 열매를 따서 밀봉한 채 여름 볕에 2~3일 내어 두면 미생물에 의해 과육이 발효된다. 물을 받아 조물거리며 위에 뜬 과육과 덜 영근 씨앗을 걸러낸다. 한 차례 푹 발효되어 씨앗을 통해 전염될 병도 줄어들고, 미끈거리며 둘러 쌓였던 것들이 깨끗하게 걸러진다. 그러니 입추는 농사의 시작이다. 고추, 오이, 가지, 토마토, 참외, 당근 등 씨앗을 준비하고 가을작기를 심을 밭을 다룬다.
다 익어도 초록색이나 씨앗은 빨강인 먹골참외, 둥근 풋사과처럼 생기고 메론과 참외 중간의 식감을 가진 달큰한 향이 좋은 사과 참외, 씨앗을 받는다. 사진_배이슬
김장거리들 대부분 (고추, 대파 빼고) 당근, 무, 배추, 갓 등 다양한 작물들이 입추를 즈음하여 씨앗을 심는다. 억세디 억세진 풀보다 방금 싹을 낸 배추모종은 보드랍고 맛이 좋아 많은 초식곤충들에게 매력적인 먹이가 된다. 그래서 배추 씨앗을 모종낼 때는 바닥에서 띄워 잎벌레들이 덜 먹게 한다. 무더위가 더 길어지는 만큼 배추 속이 덜 차더라도 조금 늦게 모종을 내면 벌레를 덜 타고, 작은 배추들은 겨울나기도 수월해져서 이듬해 꽃으로 먹거나 씨앗 받기도 좋다.
배추 모종을 준비하는 때다. 작년에 이어 올해는 더 늦게 내려고 마음먹었다. 속이 덜 차도 입추의 가을이 더 짙어지면 벌레를 덜 탄다. 사진_배이슬
할머니와 나의 여름방학
입추 즈음은 여름 방학 때였다. 하루종일 집에 있으니 10시 되기 전에 한 번, 네다섯 시쯤 한 번 할머니 마실물과 새참을 들고 “할~마~니~이~! 할머~~~~니이~~~!” 소리치며 온 마을을 돌아댕기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시원한 물과 아주 뜨끈한 믹스커피, 집에 있는 과일이든 과자든 참거리가 될 것을 싸 들고 논둑을 달리고 밭을 가로지며 아주 많은 것을 배웠다.
비탈진 논둑을 펄쩍 뛰었다가는 데구르르 굴러 넘어진다는 것, 마을 구석구석 그즈음에 피고 지는 식물들의 변화, 00집 할머니네 밭을 가로질렀다가는 된통 야단을 맞는다는 것.
할머니 찾아 삼만리로 온갖 데를 다니면 하루에도 뱀을 자주 만났다. 잔뜩 겁을 먹고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뱀을 쫓아보겠다고 막대기를 휘드르며 고함치던 일도 많았다. 덕분에 배운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길로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을의 생태와 관계를 배우는 일이었다. 만화영화에도 나오지 않을 나만의 모험을 펼치던 그날의 기억들이 지금도 진안에서 살게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참을 가져가면 할머니는 손지딸 때문에 산다며 나무 그늘에 앉아 맛있게 드셨다. 그러나 드시기 전에는 꼭 한 조각 툭! 떼어 “고수레~” 하고 던졌다. 얼마 안 되는 새참을 그런 데 떼어 뿌리시면서 함께 먹어야 한다셨다. 도시에서 공원에서 샌드위치 먹다가 고수레~ 하고 던지면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겠지만, 논밭에 내가 먹는 것을 던지는 것은 미신처럼 보이지만 결국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곳에 벼를 기르며 함께 먹고 사는 생명들과 나누어 먹는 마음, 그렇게 할머니가 던진 빵과 과일은 개미도 먹고, 새도 먹고, 땅도 먹었다.

딱딱한 복숭아, 천도 복숭아를 좋아하던 할머니를 위해 새참으로 복숭아를 들고가는 일이 많았다. 할머니는 다 베어 먹고 나면 복숭아 씨앗은 호미로 땅을 푹! 파서 넣었다. 할머니가 무심한 듯 버리지 않고 흙으로 돌려보낸 복숭아는 그렇게 논 사이에, 밭 가상에 나무로 자랐다. 여름이면 할머니의 새참이었던 복숭아나무 밑에서 새참을 먹는다.
여름이면 땀에 흠뻑 젖어 헤어진 할머니의 남방이 생각난다. 목에 두른 수건으로 연신 땀을 훔치지만 이미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깜깜한 다저녁에 할머니 찾는다고 돌아댕기다 못 마주치고 돌아와 마루에서 기다리다 잠이든다. 수돗가에서 절벅절벅 땀 묻은 옷 훌렁 벗어 빨고 씻는 소리가 나면 할머니가 온 걸 알았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던 해까지도 해질 대로 해져 구멍이 난 그 여름 남방을 입고, 밤에야 돌아와 속을 태웠다.
그때는 ‘그거 쪼금 더해서 뭐 얼마나 먹는다고 늦게까지 하냐고 젊은 나도 못그런다’ 타박했는데,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얼마든 큰 돈을 주고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정성으로 키워진 것들을 먹이고 먹는 삶과 사랑의 근원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온열질환으로 응급실에 실려 간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너 멕이느라 그런 거야’ 하고 이야기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여름방학이 가르쳐 준 것들이다.
한여름 땀에 젖은 할머니의 여름은 먹고 먹이고 그렇게 내려져 온 사랑이었다. 한여름 할머니와 두부를 만들었다. 사진_배이슬
벼크는 소리에 놀라 개가 짖는다 ~~^^ 해학이 넘치는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