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형의 에너지 꽈당 | ③ 기술은 있다, 쓸 의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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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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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30 이순형
"그리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은 전기를 어떻게 더 많이 보낼지를 고민하지만, 이제는 전기를 그 지역에서 사용하며, 어떻게 저장하고, 제어하고, 효율적으로 쓰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기술은 이미 다 있다.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화와 ESS, 수전해를 통한 수소활용, 무효전력, 스마트 계통 설계까지."

이순형 교수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에너지안전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동신대학교 전기공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전기기술사이다. 전력계통 운영과 신재생에너지 접속 문제, 분산형 전원 기술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주도해 왔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과제인 ‘영농형 태양광 발전 표준모델 실증’ 연구의 책임자로서 농촌 기반 에너지 전환의 현장 모델을 설계했다. 2020년 은탑산업훈장, 2024년 전라남도지사 표창과 대한전기학회 춘계학술대회 우수논문상을 수상했다. 대표 강의는 ‘전력계통’, ‘에너지변환공학’, ‘신재생에너지공학’ 등이며, 저서로는 『신재생에너지공학』과 『계통연계기술』 등이 있다. 전라남도 정책자문위원회 전략산업분과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지역 기반 에너지 정책의 실용화와 대중 소통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기술자 없는 에너지 전환 정책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기술 축적, 정밀한 계통 설계, 경제성과 안정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시기의 에너지 정책을 되돌아보면, 그 핵심에 기술자는 없었다. 에너지 정책을 설계하고 집행해야 할 자리에 전기와 계통을 아는 기술자가 없었다. 대신 환경단체와 시민단체가 정책을 주도했다. 전력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전문가들이 미래 에너지 방향을 정한 것이다.
전기는 단순히 ‘전기를 생산하면 된다’는 사고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전압과 주파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고,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실시간으로 맞춰야 한다. 송전선, 배전망, 무효전력, 동기화, 계통 안정화 장치 등 수많은 기술적 요소가 긴밀하게 연결돼야 한다. 그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전체 계통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구호 중심의 정책을 추진하면, 현장에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출력제한 문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풍력이나 태양광 발전소가 아무리 많아도, 계통에 전기를 넣지 못하면 발전이 차단된다. 이미 지어진 설비들이 가동조차 못 하고 있는 상황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고 하면서, 송전망과 배전망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전력 품질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기술적 논의가 빠져 있었다. 정책 결정자들은 '탄소중립', '탈원전' 같은 명분에만 몰두했고, 기술자들은 그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기술 없는 정치와 환경의 결합
문재인 정부 시기 에너지 정책은 한 마디로 '정치와 환경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 없는 결합이었다. 정부 내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실무자들조차 전기를 전공한 사람이 드물었다. 송전이 뭔지, 무효전력이 뭔지, 계통안정화 장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조차 모른 채 정책이 추진됐다. 이로 인해 에너지 정책은 구호 중심의 캠페인처럼 흘러갔다.
특히 신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은 계통망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확장이었다. 신재생발전소를 설치하면 한전 계통에 접속해야 전기를 팔 수 있는데, 그 접속이 불가능한 지역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설치량 확대'에만 집착했다. 태양광 설치면적이 늘어나고 풍력 타워가 늘어나면 정책 성과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송전망이 준비되지 않아 발전을 못 하는 '죽은 설비'가 수두룩했다.
정책의 방향이 기술적 타당성보다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움직였다는 점도 문제였다. 환경단체의 요구가 있으면 그에 맞춰 정책이 바뀌고, 국제 회의 일정에 맞춰 서둘러 로드맵을 발표했다. 실제로 계통이 그 정책을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검토는 없었다. 구호는 빠르고 자극적이었지만, 기술적 준비는 미비했다. 결과적으로 국민 세금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되고, 전력 시스템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에너지 정책은 국가의 산업경쟁력과 직결되고, 국민 삶의 질과도 직결된다. 전기 요금이 올라가면 물가가 오르고, 제조업이 흔들린다. 반대로 계통이 불안정해지면 정전 위험이 커지고, 신뢰성 높은 공급이 어려워진다. 이런 중대한 영역을 다루는 정책에 기술자가 배제돼 있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시스템의 실패였다.
정책 결정의 중심에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전력 분야에는 100년 넘게 축적돼 온 기술과 경험이 있다. 무효전력 보상장치, 계통 안정화 장치, 그리드포밍기술, ESS(에너지 저장 장치) 등 다양한 기술적 대안도 이미 준비돼 있다. 하지만 정책을 설계하는 이들이 이런 기술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모든 계획은 탁상공론에 그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전환이 성공하려면, 정책 결정의 중심에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정책은 정치가 아니라 기술과 철학에 기반해야 한다. 단기적 이미지 개선이나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계통을 이해하고 시스템 전체를 설계할 수 있는 전문가의 참여다. 에너지 정책은 구호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과학으로 구축되는 시스템이다.
정책은 20세기, 기술은 이미 21세기
출력제한 문제는 기술이 없어서 생긴 게 아니다. 이미 모든 기술은 다 나와 있다. 출력제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치들이 있고, 이미 상용화된 기술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ESS, 그리드포밍기술, 무효전력 보상장치, 수전해 기술 같은 것들이다.
송전선만 깔면 해결될 거라는 발상은 기술적 진화의 흐름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장주기 ESS를 설치하면 출력 제한 문제를 일정 부분 해결해 갈 수 있다. 단지 기술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무효전력 보상장치 같은 것을 설치해도 지금 겪고 있는 전력계통의 제약은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그런데 정부는 ESS에는 1조 원도 안 쓰고, 송전선 건설에만 72.8조 원을 쏟아붓겠다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돈이 아니다. 돈은 충분하다. 방향이 틀렸다. 시스템이 잘못 설계되어 있고, 정책이 기술적 진보를 반영하지 않는다. 출력제한이라는 문제에 대한 접근법이 구시대적이다. 이건 20세기 방식이다. 이미 21세기의 기술은 준비되어 있다.
송전선 없이도 전력 품질을 높이는 핵심 기술들
지금까지 전력 시스템은 피라미드형 구조였다. 중앙에서 전기를 대규모로 생산하고, 그것을 전국으로 흘려보내는 구조다. 송전선이 그 중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산형 발전, 지역 기반의 전원, 그리고 ESS 기반의 저장 기술, 전해조를 이용한 수전해 기술로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전기를 만들고, 저장하고, 필요한 곳에서 쓰는 구조로 가야 한다. 장주기 ESS와 그리드포밍기술, 수전해방식이 바로 그 중심에 있는 기술이다. 전기를 생산할 때 남는 전기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섹터커플링 기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기술은 다 준비되어 있는데, 왜 아직도 송전선에만 의존하고 있는가?
예산 집행을 보면 정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보인다. ESS와 같은 기술에는 예산이 거의 배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송전선에는 72.8조 원이 배정된다. 방향이 완전히 잘못됐다. 전력 수급 불균형을 해결하려면, 기술 중심의 접근이 필요하다.
ESS와 무효전력 보상장치 같은 것은 송전선 없이도 전력 품질을 높여줄 수 있는 핵심 기술이다. 이 장치는 실제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압을 안정화시켜 전력 계통의 효율을 극대화한다. 이런 장치들이 전국에 깔리면 송전선 몇 개를 더 까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기술자라면 이건 상식이다. 문제는 기술자가 정책 결정 과정에 없다는 데 있다. 정책을 짜는 사람들이 이 기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옛날 방식으로, 송전선만 깔면 다 해결된다고 믿는다. 이건 잘못된 신화다.
출력제한의 원인은 명확하다. 계통이 부족해서다. 그런데 계통을 시설하기는 하되 그 계통을 무조건 많이 물리적으로만 확장하려는 방식은 비효율적이다. ESS, 무효전력 보상장치, ICT 기반 전력관리 시스템, 섹터커플링 등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72.8조원 중 일부를 나누어 할당하면 전국의 계통을 디지털화하고도 남는다.
송전 중심이 아니라, 분산과 저장 중심으로의 전환
그리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지금은 전기를 어떻게 더 많이 보낼지를 고민하지만, 이제는 전기를 그 지역에서 사용하며, 어떻게 저장하고, 제어하고, 효율적으로 쓰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기술은 이미 다 있다.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화와 ESS, 수전해를 통한 수소활용, 무효전력, 스마트 계통 설계까지.
핵심은 기술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쓸 의지가 있느냐이다. 기술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정책이 그 기술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출력을 제한할 필요도 없고, 버릴 이유도 없다. 필요한 건 방향 전환이다. 송전 중심이 아니라, 분산과 저장 중심으로의 전환.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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