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구자덕 리맨 대표 | 순환경제, 재제조·재사용 산업의 제도 공백부터 메꿔야
- Theodore
- 9월 26일
- 5분 분량
2025-09-25 최민욱 기자
국내에서 연간 판매되는 PC는 약 450만 대에 달한다. 그러나 공식 제도 내에서 IT 자산 처리(ITAD)와 재제조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리맨이 다루는 물량은 약 9만 대, 전체의 2%에 불과하다. 이 수치는 국내 재제조·재사용 산업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상당수의 중고 디지털 기기는 처리 경로가 불분명하며, 상당수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은 채 해외로 흘러가거나 비공식 유통망을 통해 거래된다. 리맨 구자덕 대표와의 인터뷰를 통해, 대한민국 재제조·재사용 산업이 직면한 제도적 공백과 구조적 한계, 순환경제로의 이행 과정에서 필요한 과제를 살펴본다.

자원순환을 가로막는 인증 체계의 부재
재제조 제품이 시장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품질 보증 체계가 필요하다. 현재 자동차, 전기·전자, 건설·산업기계 등 총 45개 품목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재제조품 품질 인증 기준이 개발·고시되어 있다. 그러나 매년 수백만 대가 폐기되는 컴퓨터와 노트북, 통신·사무기기 같은 IT 기기 분야에는 아직 이와 같은 인증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다. 국가 공인 표준의 부재는 곧 소비자가 재제조 제품의 성능과 안전성을 신뢰할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리맨은 자체 표준을 만들어 품질 인증을 받기 위해 4년 동안 준비하고 노력했지만,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는 일은 여전히 멀게만 보인다.
이러한 제도적 공백은 시장에서 ‘중고’라는 낙인이 성능이나 품질보다 앞서 적용되는 왜곡된 평가 기준을 강화한다. 신제품의 경우 100개 중 1개 불량이 발생하더라도 단순히 ‘운이 나빴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지지만, 재제조 제품은 단 한 건의 불량 사례만으로도 ‘역시 중고라서 그렇다’는 불신이 시장 전체로 확산된다.
품질 인증 기준이 없는 것은 공공 조달 시장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가장 큰 제도적 장벽이기도 하다. 현행 제도상 공공기관은 예산을 사용해 중고나 재제조 IT 기기를 공식적으로 구매할 수 없다. 물품을 기증받는 것은 허용되지만, 직접 구매하려면 자산관리공사의 ‘온비드’와 같은 플랫폼에 입찰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고 컴퓨터는 아예 항목 등록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예산 절감과 자원순환이라는 정책적 기회가 제도 미비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수리할 권리를 제한하는 제품 디자인
재제조 산업의 기반은 제품의 수리가능성에 있지만, 원제조사의 정책은 이와 충돌한다. 대부분의 전자제품 제조사는 재제조 업체에 부품을 공급하거나 기술 지원을 하지 않는다. 특히 부품이 모듈 단위로만 공급되는 구조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스마트폰의 경우 액정의 바깥 강화유리만 파손되었을 때 실제로는 강화유리만 교체하면 되지만, 제조사는 이를 별도로 제공하지 않고 디스플레이 모듈 전체를 높은 가격에 판매한다.
이와 더불어 제조사들은 특허를 활용해 제3자의 수리를 제약하기도 한다.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은 특허 출원만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해, 경쟁 업체의 시장 진입을 차단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소비자는 사설 수리업체나 직접 수리를 선택하더라도 공식 서비스센터를 이용하는 것과 비용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한다. 이는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아직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기기들이 높은 수리비용 때문에 조기에 폐기되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책상 밑에 잠든 자원, 품목별 수가 체계가 필요해

대기업과 공공 부문에서는 불용 IT 기기가 입찰 등을 통해 전문 처리 업체로 이전되는 체계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순환경제의 완성은 개인과 중소기업이 보유한 방대한 ‘잠자는 자원’을 어떻게 회수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환경공단 등이 운영하는 공공 수거 시스템은 이 과제와는 거리가 멀다. 방문 수거를 신청하려면 최소 5대 이상을 모아야 하고,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맞춰 직접 전달해야 하는 등 절차가 불편하다. 수거함 방식은 도난 위험이 크고, 수거 이후 처리 과정도 투명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데이터 보안이다. 공공 수거 체계는 데이터 삭제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제공하지 않으며, 실제 삭제 여부를 개인이 확인할 방법도 없다. 민감 정보 유출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다수의 개인과 소상공인은 사용하지 않는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폐기하지 못한 채 집이나 사무실에 장기간 보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재사용·재제조 산업으로 흘러가야 할 자원이 막히고, 국가적 차원의 자원 낭비로 이어진다.
따라서 개인과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한 별도의 수거 체계가 필수적이다. 단순히 기기를 수거하는 수준이 아니라, 데이터 삭제와 보안 리포트 제공, 투명한 처리 과정 보장을 함께 제공하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일부 민간 협력 모델에서 보듯, 이러한 체계는 새로운 자원순환 경로를 열고 수거의 신뢰성을 높이는 기반이 된다.
고부가가치 자산으로서의 IT 폐기물
리맨은 전자폐기물(E-Waste) 대신 디지털 폐기물(D-Waste)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단순히 모든 전자제품을 포괄하는 범주가 아니라, 컴퓨터·서버·노트북·스마트폰처럼 디지털 기기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을 별도로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한 명칭의 차이가 아니라, 산업 구조와 서비스 모델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디지털 기기는 두 가지 차별적인 특성을 지닌다. 첫째, 데이터 삭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단순 전자제품 폐기와 달리 개인정보·기업 기밀이 담긴 저장장치가 내장돼 있기 때문에, 폐기 과정에서 보안이 확보되지 않으면 오히려 심각한 위험 요인이 된다. 둘째, 소규모 수리만으로도 재사용 가능성이 높다. 액정 교체, 배터리 교환, 저장장치 업그레이드 등 비교적 간단한 조치만으로도 기기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어, 단순히 폐기할 자원이 아니라 ‘재사용 가능한 자산’으로 기능한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불용 IT 자산을 단순 폐기하지 않고, 매각이나 기증을 통해 재사용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택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ITAD(IT Asset Disposition, IT 자산 처리)라는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이다. ITAD는 단순한 회수와 재활용을 넘어, 데이터 삭제, 보관·운송 대행, 자산 매각 준비, ESG 보고 지원까지 포괄하는 서비스 체계로 작동한다. 즉, D-Waste는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보안과 자원 가치가 동시에 얽힌 특수 자산이며, 이를 안전하게 처리하고 새로운 순환 구조로 편입하는 것이 ITAD 산업의 본질이다. ITAD를 통해 D-Waste는 재사용·재제조·재활용이라는 세 축으로 순환된다. 이는 디지털 폐기물이 단순히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보안이 확보된 상태에서 새로운 가치로 재탄생할 수 있는 자원임을 보여 준다.
세계가 주목하는 D-Waste의 경제적 가치
디지털 폐기물은 ‘도시 광산(Urban Mining)’ 가운데 가장 가치가 높은 자원이다. 컴퓨터 한 대에 함유된 금과 은의 양은 냉장고 10~20대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 여기에 AI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데이터 전송 효율이 가장 높은 금과 같은 희귀금속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부각되고 있다.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라, 국가 자원 안보와 직결된 고부가가치 원재료 공급원이라는 점에서 D-Waste의 의미가 규정된다.

이러한 잠재력을 일찍이 인식한 글로벌 기업들은 ITAD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세계 주요 ITAD 기업인 심스 라이프사이클(Sims Lifecycle Services), 아이언 마운틴(Iron Mountain), 테스(SK-Tes)는 적극적인 인수·합병 전략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SK에코플랜트가 약 1조 원을 투입해 TES를 인수한 사례는, ITAD 산업이 단순한 폐기물 관리가 아니라 글로벌 자원순환·데이터 보안·ESG 경영을 포괄하는 성장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순환경제 통계의 빈칸, 재사용과 재제조
국내 탄소중립 계획에서 자원순환 부문의 기여도는 3~5% 수준으로 평가되어 있다. 이는 해외 연구들이 자원순환의 잠재적 감축 기여도를 약 25%로 평가하는 것과 큰 격차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국내 통계가 자원순환의 범위를 ‘재활용(Recycling)’에 한정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염 저감 효과만 반영하기 때문이다. 원자재 채굴부터 완제품 생산까지의 전 과정을 생략하게 하는 ‘재사용’과 ‘재제조’의 자원 절감 효과는 현행 통계에서 배제되어 있다.

정책 설계 단계에서부터 재사용·재제조의 탄소 감축 효과를 정량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재사용 부문은 LCA(Life Cycle Assessment, 전과정평가)를 적용하기 어려워, 탄소 절감 효과를 체계적으로 산출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SPC 보고서나 일부 지방정부 연구에서는 대체적인 평가 방식을 활용하고 있으나, 국제적 표준이 부재해 제도적 반영에는 한계가 따른다. 따라서 재사용·재제조의 효과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평가 방법론 도입과 이를 뒷받침할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
재사용·재제조 산업, 경쟁에서 협력으로
국내 재사용·재제조 시장은 여전히 다수의 영세 업체들로 나뉘어 있고, 단기적 이익을 좇는 경쟁 구도가 뿌리 깊다. 업계 구심점을 세우기 위해 한때 ‘한국 IT 재생산업 협동조합’이 설립되었지만, 기대했던 협력 구조를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채 제 역할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 경험은 시장의 협력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 준다.

이런 한계 속에서 리맨은 대기업 물류망을 가진 CJ, 폐기물 수거 플랫폼을 운영하는 에코야얼스(HRM)와 함께 ‘REPLUS’라는 IT기기 기부 플랫폼을 만들었다. 이 플랫폼은 기업이나 개인이 사용하지 않는 IT 기기를 기부하면 CJ의 물류망을 통해 회수하고, 리맨이 데이터 삭제·가치 평가·재제조 과정을 맡으며, 에코야얼스는 수거 채널과 홍보를 담당하는 구조다. 단순 수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한 데이터 삭제와 처리 내역 보고가 뒤따르고, 기부된 자산은 교육기관이나 복지단체 등 사회적 필요가 있는 곳으로 전달된다. 공공 수거 체계가 충족하지 못한 데이터 보안과 투명성을 민간 협력이 보완하는 셈이다.
디지털 폐기물은 단순히 물건을 거둬들이는 일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데이터 보안, ESG 보고, 자원 가치 평가가 결합돼야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REPLUS는 이런 과정을 하나의 플랫폼에 담아내면서, 경쟁 중심으로 굴러가던 시장에서 협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재제조 산업이 던지는 질문
재제조 산업이 마주한 한계는 특정 산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원을 소비하고 버리는 방식을 사회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품질 인증의 부재, 수리권의 제약, 불완전한 수거 체계는 결국 ‘한번 쓰면 가치는 끝난다’는 통념과 ‘새것을 사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소비 문화를 제도적으로 반영한 결과다.
하지만 재제조의 의미는 단순히 ‘다시 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고치고 다듬어 품질을 보증할 수 있을 만큼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자, 완벽하지 않은 것을 변화시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철학이다. 이는 리맨이라는 이름에도 담겨 있듯이, 관계와 자원을 가능한 오래 지속시키자는 실천적 태도다.
따라서 순환경제로의 전환은 구호가 아니라 시스템의 변화로 이뤄져야 한다. 재제조 산업을 가로막는 제도적 공백을 메우고, ‘고쳐 쓸 권리’와 ‘다시 쓸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재사용, 재제조의 탄소 감소 효과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이 시급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