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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재난리포트12 ⑨ 대규모개발사업 | 대규모 개발, 공존을 위한 '합의'가 먼저다

2025-08-20 김성희 기자

한국 사회의 대규모 개발사업은 ‘지역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익집단의 카르텔에 의해 좌우되며, 민주적 절차와 주민 참여가 배제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정책 전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합의와 실행을 보장하는 새로운 거버넌스가 요구된다. 기후위기 시대의 민주주의는 단순한 투표를 넘어, 지속가능성과 공존의 합의를 만드는 힘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지역 발전'이라는 이름의 일방통행


지난 몇 년간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신도시 건설, 산업단지 조성, 교통 인프라 확충 등 국가와 지방정부가 내세우는 대형 프로젝트들은 하나같이 ‘지역 발전’을 약속한다. 그러나 정작 개발이 시작되면 주민들의 목소리는 외면당하거나 형식적 절차 속에 묻히기 일쑤다. “우리는 듣지 못했고, 보지 못했으며, 합의한 적이 없다”는 주민들의 항변은 단순한 반대가 아니다. 그 속에는 민주적 정당성의 결핍에 대한 깊은 불신이 담겨 있다.


대규모 개발사업은 흔히 ‘국익’과 ‘성장’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 생태계 훼손, 생활권 침해가 발생하고, 지역 주민은 일방적인 정책 추진의 피해자가 된다. 개발사업이 특정 이익집단과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얽혀 추진되면서, 숙의와 합의라는 민주적 과정은 실종된 것이다.


미완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의 압축 성장과 한계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로 정의된다. 핵심은 권력이 특정 집단에 독점되지 않고, 모든 시민이 평등하게 정치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자유로운 선거, 권력분립, 법치, 표현과 언론의 자유, 시민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된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란, 사회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시민의 의견을 숙고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2016년 촛불집회 현장. 사진_위키피디아
2016년 촛불집회 현장. 사진_위키피디아

한국의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권위주의를 극복한 이후 지난 30여 년간 제도적 안정과 시민 참여의 확장을 이뤄 내며 세계적 모범으로 평가받아 왔다. 2016년 국정농단 사태 당시 수백만 시민이 촛불을 들어 위기를 극복한 경험은 시민 사회의 힘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최근 한국 민주주의는 여러 심각한 균열에 직면해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합리적 토론을 가로막고 사회 갈등을 증폭시키며, 사법부 독립성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언론 불신과 가짜뉴스의 확산은 공론장을 왜곡하고, 단기적 이익을 좇는 포퓰리즘은 세대 갈등을 키우며 민주주의의 장기적 건강성을 위협한다. 실제로 2024년 EIU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8.0점 미달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제도적 외형 뒤에 감춰진 사회적 신뢰의 위기와 민주주의 질적 후퇴를 경고하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국제 약속은 있는데, 국내 정책은 반대 방향


전 세계적으로 추진되는 교통망 확충과 신도시·산업단지 개발은 탄소 배출을 급격히 증가시키고 숲과 습지를 파괴하며 멸종위기종의 서식지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UNEP 연례보고서(2024)는 “인프라 투자와 도시 확장이 인류의 1.5℃ 목표 달성을 가로막는 가장 큰 위험 요인”이라고 경고하며 환경영향평가 강화와 생태계 복원 계획의 의무화를 촉구했다. UNEP에서 2022년 발행한 보고서 또한 대규모 인프라 건설이 단기 경제 성장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생태계 서비스 손실과 지역사회 회복력 저하로 이어진다고 지적하며, 개발이 단순한 경제 논리만으로는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국제사회는 이미 파리협정을 통해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고, 생물다양성협약(CBD)을 통해 2030년까지 육지와 해양의 30%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았으며, UNEP 역시 각국의 개발 정책이 탄소중립·생물다양성 목표와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한국은 환경성과지수(EPI 2024)에서 전체 58위(50.6점), 생태계 활력 부문 100위(48.8점), 기후변화 대응 126위(30.9점, 2022년 기준)라는 낮은 성적을 기록하며 국제적 합의와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제성·속도·정치적 성과 중심으로 개발 정책을 설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선거와 정치가 개발을 결정할 때


대규모 개발 사업 성공 여부는 ‘초기 흡인력’에 달려 있다. KCI 보고서에 따르면, 일자리, 교통 접근성, 시장 여건이 확보된 지역은 성공적으로 활성화되지만, 단순히 장기 발전계획만 강조한 지역은 실패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기업 유치는 개발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지목된다. 이는 곧 경제 논리 일변도가 개발을 지배한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주민의 삶, 공동체의 가치, 환경 보전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러한 구조는 수요 예측의 과장과 왜곡으로 이어진다. 국토정책 내용에 따르면, 경전철, 관광단지, 산업단지 등 다수의 개발 사업에서 수요 예측이 실제 수요의 11~25%에 불과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전문가와 공무원들이 꼽은 주된 원인은 정치적 압력과 선거 공약이었다. 실제로 공무원·전문가 조사에 따르면, 수요 추정 실패의 약 70%가 정치적 요인, 11%가 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 개발 사업이 계획 대비 실패하는 원인으로 계획 단계에서 과도한 수요 예측이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사진_국토정책
지역 개발 사업이 계획 대비 실패하는 원인으로 계획 단계에서 과도한 수요 예측이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사진_국토정책

즉, 대규모 개발은 단순히 ‘경제적 흡인력’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익집단의 카르텔에 의해 좌우되며, 개발 타당성을 뒷받침해야 할 수요 예측은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고, 주민 참여 절차는 형식에 머문다. 그 결과, 개발은 성공적 활성화보다는 재정 부담, 환경 훼손, 지역 갈등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개발 피해, 주민의 삶을 파괴하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 사업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주민들의 보상 및 이주 대책 마련을 위한 주민 요구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다. 사진_플래닛03
가덕도 신공항 건설 사업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주민들의 보상 및 이주 대책 마련을 위한 주민 요구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다. 사진_플래닛03

이러한 잘못된 대규모 개발 사업이 추진되면 피해는 주민들의 삶과 직결된다. 주거지 철거, 농지 훼손, 문화유산 파괴, 교통난 심화 등 현실적 피해가 발생하면, 주민들은 생존권 차원에서 저항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행 제도 속에서 주민의 목소리는 ‘반대 세력’으로 단순화된다.


실제로 주민들이 가장 크게 문제 삼는 것은 민주적 과정의 부재다. 공청회나 주민설명회는 형식적으로 열리지만, 이미 확정된 계획을 추인받는 수준에 불과하다. 의견 수렴 창구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정책 반영률은 극히 낮다. 결국 주민들은 거리 시위, 법적 소송, 점거 투쟁으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고, 갈등은 격화된다.


'대형 국책사업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갈등 해소방안' 보고서에서는, 사회 갈등의 핵심은 이해관계 충돌이 아니라 ‘사실관계의 불명확성과 참여 절차의 부재’에 있음을 보여 준다. 보고서는 갈등을 예방하려면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시민 참여 확대가 필수이며, 이를 위해 갈등영향평가, 공론조사, 조정제도, 사회교육 등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감사원은 갈등이 표면화되기 전부터 경제성 평가나 환경영향평가의 타당성을 점검하는 '시스템 감사'를 통해 불필요한 갈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갈등은 더 이상 사후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 초기 단계부터 관리되어야 할 국가적 과제다.


설명회를 넘어, 숙의 민주주의로


이러한 갈등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형식적 주민설명회를 넘어선 실질적인 숙의 민주주의 방식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주민이 정책의 주체로 나서는 참여 방식으로는 ‘무작위형’과 ‘자기선택형’ 숙의 과정이 있다. 무작위형 숙의 과정은 시민배심원단이나 공론조사처럼 주민을 무작위로 선정해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대표성을 높이지만 주민은 수동적 참여자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


반면 자기선택형 숙의 과정은 주민이 스스로 의제를 제안하고 토론·결정·평가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주도성은 높지만 특정 소수에게 편중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보고서는 이 두 방식을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해 대표성과 참여성을 동시에 확보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무작위형 참여로 공론의 기반을 만들고, 자기선택형 구조를 통해 지속가능한 일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방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시민 역량 강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리왕산 7년 갈등의 끝, 협치의 가능성을 열다


가리왕산 합리적 보전 활용 협의체 합의문 서명식 현장 사진_산림청
가리왕산 합리적 보전 활용 협의체 합의문 서명식 현장 사진_산림청

가리왕산 활강경기장 복원을 둘러싼 7년간의 갈등은 정부·주민·시민사회가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사회적 합의로 원만하게 갈등이 일단락됐다. 산림청은 3월 24일, 환경단체와 정선군민, 지방정부, 관련 학회가 모두 참여한 '가리왕산 합리적 보전·활용 협의체'가 12차례 숙의를 거쳐 최종 합의문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곤돌라 존치를 둘러싼 갈등은 자연복원을 요구하는 환경단체와 지역경제 회생을 주장하는 주민 간 대립으로 확산됐으며, 정부도 애초 복원 약속과 지역 현실 사이에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갈등이 장기화됐다. 


이번 합의는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의 복원 원칙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하부 지역은 연구·치유·교육 등 공익 목적의 지역활성화로 활용하고, 곤돌라는 대체효과가 입증될 때까지만 한시 운영하기로 함으로써 양측의 요구를 모두 반영했다. 


특히 협의체 합의에 그치지 않고, 모든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는 ‘공동이행추진단’을 3개월 내 출범시켜 대안의 실행, 평가, 보고까지 책임지기로 하면서 합의의 실천력까지 제도화한 점이 주목된다.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는 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조율된 이번 사례는, 단순한 이해관계 조정을 넘어 한국형 숙의 민주주의와 협치 거버넌스의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보여 준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프랑스 시민기후협약, 기후 민주주의의 실험


파리 시민기후협약. 사진_공식 페이스북
파리 시민기후협약. 사진_공식 페이스북

2019년 가을, 프랑스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했다. 시민기후협약'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이 공론장은 무작위로 선발된 150명의 시민이 9개월간 숙의해 온실가스 40% 감축 방안을 마련한 과정이었다. 식량, 주거, 이동, 소비 등 생활 전반을 주제로 시민들은 전문가 브리핑과 시민단체 의견을 바탕으로 149개의 권고안을 도출했다. 고속도로 속도제한 하향, 단거리 항공편 금지, 주택 개조 의무화 등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제안도 포함됐다. 이는 시민이 정책 수용자에서 설계자로 참여한 ‘기후 민주주의’ 실험으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이 실험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마크롱 대통령은 “필터 없이 권고안을 수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입법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속도제한안은 사회적 반발로, 세제 개혁안은 경제계 반대로 빠졌고, 헌법 개정은 의회를 넘지 못했다. 시민들은 정부 응답에 평균 3.3점(10점 만점), 기후 목표 달성 가능성에 2.5점을 매기며 좌절을 드러냈다. 프랑스 시민기후협약은 숙의 과정이 제도적 실행력 없이 정치 구조에 흡수될 경우 시민 참여가 무력화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사례로 남았다.


AI, 숙의 민주주의의 새로운 도구


숙의 과정의 대표성과 정당성을 넘어, 실행력과 추적 가능성을 강화할 수 있는 도구로서 AI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AI 기반 디지털 공론장'이다.


스페인의 Decidim은 시민 제안을 자동으로 분류하고 정서를 분석해 다수 속에 묻히기 쉬운 소수 의견을 드러내며, 정책 결정자가 구조화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판단하도록 돕고 있다. 대만의 vTaiwan은 Pol.is를 활용해 시민 의견을 군집화하고 시각화하여 극단적 대립 대신 합의점을 중심으로 토론이 이어지도록 설계했다. 또한 시민 논의를 자동 요약해 정책 제안으로 전환하고, 정부의 수용 여부와 이행 단계를 추적하는 기능도 시험 중이다.


프랑스 시민기후협약 역시 이러한 기술적 장치가 결합되었다면, 더 많은 시민 의견을 효율적으로 수렴하고 권고안의 설득력을 높이며, 정치적 책임을 가시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AI는 시민 숙의를 단순한 의견 수렴의 장에서 정책 감시와 책임 요구의 제도적 통로로 확장할 수 있는 도구다.


주민 배제를 넘어, 숙의와 실행이 살아있는 거버넌스로


결국 한국 사회가 직면한 대규모 개발 갈등은 단순한 토목이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적 신뢰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질문이다. 주민을 배제한 개발은 언제든 갈등을 낳고 신뢰를 무너뜨린다. 이처럼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민주주의는 단지 투표와 절차를 넘어서야 한다.


국제사회가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에 나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프랑스 시민기후협약이 보여준 한계는 실행력을 담보할 장치의 필요성을 일깨우며, 나아가 AI 기반 공론장은 시민 참여를 확대하고 정책 이행을 추적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심화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술은 참여를 돕는 수단일 뿐, 핵심은 주민이 스스로 듣고, 말하고, 책임지는 과정을 거쳤는가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의 속도가 아니라, ‘공존의 합의를 만드는 힘’ 그리고 그 과정을 끝까지 견디고 존중할 수 있는 민주주의다.

댓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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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okim
8월 24일

과정을 끝까지 견디고 존중할 수 있는 힘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어렵게 만들어진 가리왕산 협의체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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