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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날 풍경ㅣ우리의 1980년대 ⑤ NL, 그 기묘한 이야기

2025-11-28 최은

1980년대 NL 주사파 학생운동, 1980년대 한국 학생운동에서 NL(민족해방) 세력과 주체사상이 어떻게 주류가 되었는지, 당시 활동가의 경험을 통해 그 기묘한 확산 과정과 이론적 모순을 회고한다.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정파와 논쟁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전제할 것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소개와 평가는 오직 필자의 주관적인 주장일 뿐이다. 지면 사정상 구체적인 이론의 소개는 하지 않는다. 결국 모두까기 인형과 같은 이야기일 뿐이라 해도, 부정하지 않겠다.)


가장 먼저 NL 그 기묘한 이야기

     

돌이켜 생각해 보면, NL(National Liberation)세력이 80년대 중반, 한 시대의 흐름을 선도했다는 것은 팩트(Fact)인 동시에 참 기묘한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적국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80년대 전반기 이른바 사회구성체 논쟁(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VS 주변부자본주의론에서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까지)이 격화되는 와중에, 뜬금없이 등장한 주체사상이 이후에 태풍의 눈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만약 20세기 세계 사상의 흐름을 다룬 계통도 같은 것이 있다면, 냉정하게 말해서 주체사상은 비주류의 비주류이며, 아프리카의 짐바브웨(김일성을 존경한 무가베가 37년을 해 먹은) 같은 나라에서나 희미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직 한국에서만, 'NL-주사'라는 흐름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시대의 풍운아가 되었다. (그래서 그 창조자격인 황장엽이 망명했을 때, 그저 골 때린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용어를 규정해 보자. 일반적으로 NL이라는 흐름 자체는 주체사상과 무관하다. 특히나 제3세계 운동사에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주창하는 세력은 아주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83년 초에 배포된 <1980년대 혁명투쟁의 인식과 전략>과 같은 문건들은 당대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을 미,일 제국주의와 한국 민중 간의 민족적 모순으로 파악했다. 5월 광주의 비극을 겪은 지,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압도적인 미국의 제국주의적 영향력과 특히나 36년간 우리를 지배한 식민 모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증오가 그 배경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민족해방운동’론이 주류가 된 것은 아니었다. 훗날, NL세력이 학생운동의 주류를 점했을 때조차도, 이른바 비주사NL(특히 서울대)의 흐름은 면면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NL은 학생운동의 주류가 된 것인가? 공식적인 서사에 따르면, 1985년, 서울대 단재사상연구회(김영환을 필두로 한)가 제기한 이른바 ‘AI(반제)직접투쟁론’이 확산되어, 이듬해인 1986년, 자민투(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의 결성과 전국적인 확대로 이어졌다. 10월, 이른바 건대사태(건국대에서 결성된 애학투련 발족을 막기 위해 학내로 진입한 경찰에 맞서 농성을 벌이던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체포된 사건) 이후, 운동의 급진성을 제어하고 대중노선을 채택한 NL계열 학생운동이 6월 항쟁을 주도하고, 이후 전대협 결성과 함께 주류세력이 되었다. 등등등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 결성된 애학투련 발족을 막기 위해 학내로 진입한 경찰에 맞서 학생들은 농성을 벌였다. 대학 건물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사진_대한뉴스_KC제1617호, (갈무리 이미지 선명하게 함.)
1986년 10월 건국대학교에서 결성된 애학투련 발족을 막기 위해 학내로 진입한 경찰에 맞서 학생들은 농성을 벌였다. 대학 건물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사진_대한뉴스_KC제1617호, (갈무리 이미지 선명하게 함.)

이런 서사는 교과서적이지만, 실제 벌어진 일은 다채로웠다


대학가에 퍼진 이른바 ‘강철서신’(김영환이 쓴 편지 형식의 글로서, 박헌영에 대한 글과 품성론에 대한 글이 유명하다)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아주 잠깐 이른바 주사 NL이었다.(내가 속했다는 것을 한참 후에 깨달았다) 이 문건들은 대단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주사파의 첫 복음이었다.


회고해보자면, 다른 많은 활동가들처럼, 나 역시 마치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철저히 금기시되어 온, 이북(以北)이라는 존재. 해방 이전 일제시기 때부터 한반도에 존재해 온 미제국주의의 책략과 사술(邪術).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과 그 일파가 기실 미제의 스파이였다는 사실. 혁명운동은 종파주의(宗派主義)를 철저히 배격해야 하며 이를 위해 써클운동은 청산되어야 한다는 것.


생각해 보면, 겨우 20대 초중반의 청년이 쓰고, 읽고, 대중운동으로 전화된 것 자체가 기적이고, 기묘한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후였다. 도대체 이 사상이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호기심으로, 소위 ‘대하여’ 문건(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과 같은 소위 원전(原典)류에 더해, 야밤에 라디오를 틀고 해주에서 송신하는 ‘한민전방송’을 청취했다. 이 행위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원래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은 법이다.


당시 청계천 세운상가를 가면 단파 라디오를 구할 수 있었지만, 야산에 올라 리시버를 끼고 이리저리 안테나를 돌려보면 그럭저럭 들을 만했다. 주체사상에 대한 소개, 맑스주의 원전 강화(講話), 그리고 이상야릇한 암호 메시지들. 당시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이 자고 일어났더니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론으로 바뀌는 황당한 사건은 직접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더라는 얘기로 접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렇게 꽤 공부를 해 본 입장으로서( 나중에 주사파 친구들과 얘길해 봐도 특별한 게 없었는데), 주사NL은 알면 알수록 괴랄했다. 자주적, 창조적, 의식적 존재로서 인간의 위치와 역할이 영도체계와 혁명적 사업방법, 인민적 사업작풍 속에서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OK. 혁명적 군중노선에 기반한 대중운동을 이끌 활동가로서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도 OK.


기괴한 극장국가의 공식 사상이 주체사상


문제는 이런 식의 동어반복적인 서술로 점철된 애국주의(우리민족제일주의) 서사가 오직 혁명전통(결국 ‘백두산혈통론’으로 이어지는 후계자론)의 결사적 옹위로 이어질 뿐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주체사상은 (내가 보기엔) 일종의 주의론(主意論)과 유물론을 섞은 기묘한 혼종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주사파 NL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면(그래 봐야 두어 번 정도였고, 일단 그 친구들이 나를 많이 싫어했다), 나는 정말 진지하게 “이걸 진짜로 믿는다는 거냐”라고 질문했었다. 아 물론 그 친구들은 농반진반으로 “넌, 인민의 적이야”라고 했고.


박헌영(남로당의 영수였고, 북한 정권에서 부수상에 올랐던)이 미제 스파이였고, 그를 따른 그 무수한 남로파(南勞派)는 모두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반종파주의(反宗派主義) 서사는 50년대 후반, 김일성이 차례로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던 역사적 배경 아래 나온 웃기는 얘기다.


소련에서 스탈린이 30년대에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와 부하린을 처형하고, 트로츠키를 추방, 암살한 것. 중국에서 마오쩌뚱이 60년대에 류샤오치와 펑더회이를 제거하고 이른바 주자파(主資派)로 몰아붙인 것. 그 과정에서 수백만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지식인과 인민의 생명을 앗아간 사태가 벌어진 것은, 최고 권력자의 장기집권에 대한 욕망과 관료주의가 뒤얽힌 일련의 사회주의식 자해극이었다.


그리고 이북에서 벌어진 일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고, 3대째 이어지는 백두혈통이라는 기괴한 극장국가의 공식 사상이 주체사상이었다. 이걸 잘 전달할 책무를 지닌 활동가는 훌룡한 품성(品性)으로 무장한 인전대(引傳帶)로서 대중과 전위(한국민족민주전선)를 연결해야 한다는 것. 이게 다 무슨 지랄 같은 얘기인지.


 시나브로 이런 NL-주사파 이론은 대학가를 잠식했다. 85년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 이른바 SKY대학의 써클은 해산되고 기존의 민족민주론(ND)을 대체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론(NLPDR)에 기반한 운동이 주류로 우뚝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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