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염소 뿔이 녹는다는, 대서
- hpiri2
- 1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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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8 배이슬
"비가 내리 와도 콩이 썩어 잘 싹트지 않거나, 과일이 물러지고 꽃가루를 잘 받지 못해 속이 타고, 해가 오래 나도 벼가 자라지 못하고, 옮겨 심은 깻모나 고구마가 비실거리고 타들어 간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가물면 가문대로 속이 타니, 영락없이 우산 장사하는 자식과 짚신 장사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 마음이 된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편집자주 농가월령가'는 조선 시대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농가에서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할 일을 달의 순서로 읊을 수 있도록 만든 노래이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농꾼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거둘까? 전북 진안의 배이슬 농꾼은 "24절기는 해의 시간, 달의 시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시기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올 한 해 절기마다 그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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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뿔이 녹는 더위, 대서
대서는 큰 대(大), 더울 서(暑)를 쓰는 큰 더위를 뜻한다. 말 그대로 가장 더운 때가 왔다는 의미다. 이전 같았다면 이른 장마가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찌는 더위가 시작되는 때다. 그러나 이르게 시작한 더위는 이미 기상관측 이래 가장 더운 날이라는 기록을 다시 쓰는 해가 계속되고 있다.
마른장마 같던 소서를 지나 폭우와 폭염을 오락가락하고 있다. 매미가 울고 잠자리가 날기 시작한다. 여름밤 짧은 산책길에는 요란하리만치 새소리 개구리소리 벌레소리가 들리고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만나는 때이기도 하다. 그냥 더운 게 아니라 덜 마른 빨래처럼 가득 찬 습기 덕에 더 덥게 느껴진다. 오죽 더우면 대서 더위에는 “염소 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까. 그러나 이는 여름이 한껏 힘을 내는 모습이다. 대서가 지나면 곧 입추, 가을이 온다. 대서는 여름의 마지막이자 들깨와 콩, 고구마까지 심느라 바쁜 철이 지나 거두느라 바쁜 시절이 오는 사이의 시간이다.
논에는 비가 좀 오고 옥수수에는 비가 안 왔으면 하는 우산장수, 짚신장수 어머니 마음이 되는 때다. 사진_배이슬
우산 장수 짚신 장수 어머니
소서와 대서 사이에는 가뭄과 장마를 오간다. 모내기 후에 물을 깊이 대야 하는 논에 마른장마가 오지 않고, 열매들이 몸집을 키워야 하는 때 목이 타는 가뭄이 계속된다. 블루베리가 부러 말린 건포도처럼 쪼글쪼글하다. 암만 물을 대봐야 찌는 더위와 긴 가뭄에 장사가 없다.
비가 내리 와도 콩이 썩어 잘 싹트지 않거나, 과일이 물러지고 꽃가루를 잘 받지 못해 속이 타고, 해가 오래 나도 벼가 자라지 못하고, 옮겨 심은 깻모나 고구마가 비실거리고 타들어 간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가물면 가문대로 속이 타니, 영락없이 우산 장사하는 자식과 짚신 장사하는 자식을 둔 어머니 마음이 된다. 그래서 논과 블루베리밭에는 비가 오고 토마토 옥수수 꽃이 핀 자리에는 해가 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볕 좋은 남쪽을 향한 밭이 농사짓기 좋다고 심어오던 것이 이제는 볕이 너무 쎄서 산 밑에 그늘지는 밭이 더 좋다. 조금 일찍 그늘지는 밭이 외려 가뭄 피해가 덜하다. 기계 쓰기 좋게 평을 맞춰 놓은 밭보다 살짝 경사가 진 밭이 오히려 한 번에 내리는 비로 물에 잠기는 피해도 덜하고 내리쬐는 볕도 덜하다.
우산 장수 짚신 장수 자식을 둔 농부들은 그래서 점점 더 논밭에 시설을 더하고 있다. 비닐하우스로 비가림을 하지 않으면 토마토, 고추가 잘 달리지 않고, 가뭄이 더하니 차광막을 치는 과수원이 느는 것이다. 어쩌면 먹어온 것들, 기르는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때가 된 건 아닐까. 우산 장수 사는 곳에 비를 내리고 짚신 장수 사는 곳에 해를 쬐어 주지 않아도, 비오는 날은 우산 장수가 더 잘살고 짚신 장수도 한참 쉬어가니 좋다 하고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게 논과 밭을 만들어야 하는 때다.


비오는 날, 논물 대기
20대 후반이 되어가던 때, 마을에서는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왔다 갔다 기름값도 안 나오게 풀 키운다며 걱정 어린 말들을 듣던 때(지금도 늘 듣지만) 안부 인사처럼 마을 어른들은 시집은 언제 갈래, 지금이 금값이라며 서두르라고 재촉들을 하곤 하셨다. 농촌에서는 유독 젊은 여성은 미완의 존재로 누군가의 지붕 밑에, 그늘 밑에 들어가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머니는 주변 사람들 말에 슬그머니 “너는 혼자 그러고 살을래?” 물어보곤 했다.
“로타리도 치고, 운전도 하고, 장도 담그고, 밥도 해 먹고 혼자 잘 만 사는데? 뭐더러 시집간데? 난 어디다 놔도 안 굶어 죽을 건데? 시집 안 가고 할머니랑 둘이 살 건데?!” 하고 호기롭게 얘기하곤 했다. 그 후로는 마을 분들이 물으면 할머니가 나서서 “뭐더러 남의 집 가서 고생하면서 살어, 혼자 사는 게 신간 편하지”라고 답하고는 했다.
맨날 혼자 잘 산다, 호기롭다가도 함께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었는데, 바로 밤중에 내리치는 비 사이로 논둑을 보고 물꼬를 보고 다녀야 하는 때였다. 할머니는 밤이든 새벽이든 비가 쎄게 온다 치면 어김없이 논에 갔다 왔다. 장맛비가 무섭게 쏟아지면 대낮에도 캄캄하고 무서운데 오밤중에 천둥번개 사이로 논물을 보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는지 나도 알아야지 하고 할머니 손 붙잡고 나서기도 했지만 세상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작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늘에 구멍이 난 것 같은 밤에 심호흡을 여러 번하고 우비를 단디 입고 빗속에 논물을 보러 갔다. 살인마가 나오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 번쩍이는 번개 사이로 삽을 들고 걸어가는 우비 입은 사람. 그게 나라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우비를 때리는 빗소리는 누가 소리쳐 불러도 안 들릴 것 같았다.
번쩍일 때 비치는 들판에는 나만 걸었다. 논둑을 따라 걷다 팩! 하고 미끌어지길 여러 번,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로에 떠내려온 돌덩이 나뭇가지들을 빠른 물살에서 끄집어 내려고 발을 담그고 손을 뻗으면 얼굴이고 웃통이고 물벼락 치듯 물을 뒤집어 썼다. 겨우 논으로 물이 가지 않게 농수로를 열고 논둑을 살피고 집으로 와서는 우비를 벗다가 주저 앉아서 펑펑 울었다.
할머니는 내가 잘도 자고 있는 사이 여름마다 이걸 혼자 다했구나 싶어 속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혼자 그렇게 논물 보고 들어왔다고 하면 저 어린 것이 어찌 했냐며 걱정 어리게 보시던 게 생각이 났다. 혼자 다 해냈다고 큰 나뭇가지가 막고 있었는데 어떻게 꺼냈는지, 물을 한바닥 뒤집어 쓴 이야기를 할머니한테 떠들어대고 싶었다. 할머니는 겁도 없이 그걸 했냐고 장하다고 하셨을 텐데 할머니가 보고 싶어 퍽퍽 울다가 생각했다. 서툴지만 혼자 해냈다고 생각하니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혼자 못할 것 같던 비 오는 밤에 논물 보기를 해내고 나니 세상 겁날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밤에 무섭다고 덜덜대던 내게 무서울 것이 뭐가 있냐던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혼자 밤중에 논물 보고 온 날, 할머니가 보고 싶어 펑펑 울었다. 할머니와 비를 맞고 논물 보고 집에 가던 날. 사진_배이슬
낫들고 싸우다 함께 춤추는 날, 백중날
가뭄이 길면 논에 물을 대느라 날카로운 신경전이 오고 간다. 요즘이야 양수기로 물을 퍼내기도 하고 논밭 근처에 관정을 파기도 하지만, 저수지와 둠벙에 물을 가두고도 하늘만 바라보던 때는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논은 마을 위 저수지부터 하천에 있는 마지막 논과 밭까지 살아있는 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윗논에서 물을 흘려 내려보내지 않으면 밑에 논은 더 가물었다. 한 필지 한 필지 모두 섞여 있으니 내 논 대자고 물길을 많이 대면 아랫논이 물이 모자라고, 모자란 물은 그 아래 다시 본인 논이나 밭에 물이 모자랐다. 그래서 모내기 전부터 벼가 자리 잡는 때까지, 또 요즘처럼 장마에 비가 오지 않을 때는 조용히 전쟁이 일어나곤했다. 이른 새벽에 논에 물을 들어가게 하고 밭에 갔다가 밥때에 다시 들르면 누군가 물이 들어가지 않게 바꿔 놓았다. 그럼 다시 물을 대고 끊어진 걸 발견하기를 하루에 몇 번씩 하게 된다. 가뭄이 심할 때는 더했는데 할머니는 내 모르고 살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물전쟁에 참전했다고 했다.
하도 물길을 터놔서 이제 누구 손 안 대겠지 하고 오밤중에 물길을 대러 가니 위 논둑에 물길 끊어 놓은 범인(?)이 되레 겁을 주었단다.
“흠! 거 어느 놈이 물꼬를 또 터놨네, 또 트러 오는가 오기만 해 봐 확 바지를 벗어버려야지!”
“하이고 호미를 갖고 올 일을 낫을 들고 왔네, 내리기만 혀 봐. 손에 낫들렸응게!”
할머니는 겁도 안 났어? 어떻게 그랬어? 했더니 사실 한평생 한마을에 살아온데다 윗논 아랫논 누구 것인지 다 아니 걸음걸이만 봐도 서로를 알아봤단다. 겁이나도 한해 농사 목숨 달린 일이니 그리했다고. 그래서 가뭄이 길어지면 형님, 동생하며 가까이 살던 사이도 길에서 인사도 않고 멀리 걸어가기도 했단다. 서로의 세계나 다름없이 함께 살아온 사람들끼리 그렇게 갈등이 깊어 어찌 살았나 싶지만, 어릴 적을 떠올려 보면 마을에서는 이맘때 대서가 지나고 한여름쯤에 술멕이라고도 하고 백중날이라고 하는 마을잔치를 했다. 집집마다 쌀을 모으고 돈을 모았다. 모아진 쌀로 할머니는 커다란 항아리에 술을 담았다.


마을 둥구나무 아래에 솥이 걸리고 노래방기계도 설치됐다. 음식을 하고 천막을 쳤다. 내내 마을에는 트로트가 흘렀다. 허리 펴기 어렵다던 동네 할머니가 지팡이 없이 춤을 추시고 맨날 무서운 표정의 할아버지도 활짝 웃는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셨고, 술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속엣말도 했다. 말 없이 서로 등을 토닥이는 것으로 낫 들고 싸우던 일은 사라졌다. 왜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는 서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느라 바쁘고 가뭄에 속 타던 일을 접고, 농삿일은 심느라 바쁜 때에서 거두는 일이 더 많아지는 전환점에서 이렇게 마을잔치를 했다. 김매기를 마치고 호미를 씻어 건다는 뜻으로 '호미씻이'라고도 하고 서로 실컷 술을 먹이고 마신다며 '술멕이'라고도 했다. 더위와 함께 서로 속상했던 갈등을 풀어내던 날이었다.
대서의 논밭
대서에는 돌도 자란다고 했다. 애지중지 키우는 작물들은 빌빌 타거나 비에 잠기는 속상한 일이 느는데 어쩜 풀과 돌은 매년 베고 캐도 느는지 신기하다. 대서에는 풀도 씨가 맺혀서 그냥 베어 눕히면 풀이 더 많이 나서 반드시 두엄더미에서 푹 썩혀 거름으로 썼다. 콩, 고구마 들깻모를 마지막으로 심는 때이자 고추를 따느라 땡볕에 있게 되는 때다. 먹을 게 많지만 더위도 주워 먹게 되는 때라 더위에 지친 몸을 돌보는 음식을 해 먹는 때이기도 하다.
대서 때 논밭 풍경. 사진_배이슬
복날 특정해서 몸보신 음식으로 육식을 많이 하는 때다. 방아 찧고 난 쌀겨와 싸래기와 풀을 먹여 키운 닭은 잡아 황기를 몽땅 넣고 한끼 해 먹기도 하지만 물 말은 밥에 풋고추를 된장 찍어 먹고, 호박잎을 쪄서 밥을 싸먹는 것이 제일 몸보신이 되었다. 밥하느라 불 앞에 있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이르게 늘어난 벌레들 사이로 올해는 배추모를 얼마나 어찌 키울지, 감자 캔 밭에 두둑을 잘 덮으며 양파, 마늘, 배추, 당근 심을 일을 고민한다.
폭우와 폭염 사이를 헤매며 어찌 농사를 지어야 하나, 어찌 먹고 살아야 하나 점점 더 막막해지는 때다. 더해가는 극단적인 날씨의 사이에서 자연이 하는 일 앞에서 그 일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맞서기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조금 그늘진 논밭에 심거나 논밭에 미기후를 만들기 위해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들로 말이다. 염소뿔이 녹는다는 더위, 염소에게 모자를 씌우고 에어컨을 틀어주기보다 나무 밑에서 함께 풀을 먹는 것이 덜 힘들이고 함께 더 잘 먹는 일일지도 모른다.
열매들이 익는다. 일찍 심은 옥수수는 쪄 먹고 호박도 풋호박으로 먹을 만큼 컸다. 가장 보신이 되는 한 끼는 요리하지 않고 날로 먹는 것들이다. 사진_배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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