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픽션 '더 체인'ㅣ#7화. 양안
- hpiri2
- 8월 22일
- 5분 분량
2025-08-22 정욱식

“힘들 거예요.”
장승희 박사가 여객기 옆자리에 있는 이한결에게 말했다. 양안관계 전문가인 장승희는 이한결의 부탁으로 평화연구소 객원 연구위원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양안 문제의 향방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앞날에 중대 변수가 될 거라는 데 공감하면서 중국 샤먼과 대만 진먼도를 방문하기 위해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이한결은 장승희에게 민간 차원에서라도 양안 대화를 중재해 보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장승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지었다.
2025년 들어 미국에선 타럼프 행정부가 출범하고 독립 성향의 라이창더가 대만 총통으로 취임하면서 대만 해협의 위기는 높아지고 있었다. 중국의 대만 포위 훈련도 잦아지면서 파고의 높이를 더했다.
“저건 샤진대교라고 하는데, 샤먼과 진먼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공사하는 것입니다.”
장승희의 물음에 택시 기사가 말했다. 샤먼 공항에 내린 이한결과 장승희는 진먼도로 가기 위해 샤먼 우퉁마터우((五通码头)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이한결이 ‘그럼 저 다리가 진먼도까지 연결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기사가 답했다.
여객선에서도 샤진대교 해상 공사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저게 앞으로 양안 관계에 변수가 되는 거 아닌가?’ 이한결이 해상 공사 현장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진 사이에 어느덧 여객선은 진먼의 샤투(厦渡) 항구에 도착했다. 배로 불과 30분 거리였다.
“샤진대교가 양안 문제의 큰 변수로 등장할지에 대해 질문 주셨는데요.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모르겠습니다.”
국립진먼대의 한 교수가 간담회 자리에서 샤진대교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했다. 그는 현재 진행 중인 공사는 샤먼과 샹안구에 건설 중인 신공항과 연결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진먼다오로 연결하는 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한결과 장승희, 그리고 진먼대의 10여 명의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간담회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로 진행됐다. 4개월 전에 이한결과 장승희가 타이베이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타이베이에선 양안 간의 대화와 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이한결의 발언에 반박과 침묵, 그리고 낙담이 지배적이었다. 민진당 인사는 양안의 평화를 해치는 쪽은 중국이라고 반발했고, 국민당 인사는 대화와 평화 얘기를 꺼냈다간 ‘친중’으로 몰려 정치적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초당적인, 그리고 중국과 대만 사이에 대화를 시도했던 한 원로는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민간 차원에서라도 양안의 긴장완화를 주제로 대화를 중재하고 싶다’는 이한결의 바람에 회한어린 미소로 의견을 대신했다.
“진먼도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고 가장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이면서 중국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지역입니다.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매일 샤먼을 오가고 있지요.”
진먼대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는 류페이치 교수가 진먼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말했다.
“우리 학자들도 과거에는 샤먼대 등 중국 학계와 활발히 교류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렵게 됐습니다.”
2시간에 걸친 간담회를 마치고 진먼대 부총장이 마련한 오찬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원탁에는 진먼도의 특산품인 금문고량주가 놓여 있었다.
“이 술에는 군사적 긴장 속에서도 진먼도가 지켜온 자부심이 담겨 있습니다. 귀한 손님에게 환영과 존중과 우의의 표시로 이 술을 대접하는 문화가 있지요.”
부총장이 이한결에게 잔을 권하며 말했다.
“술을 잘 드시는군요.”
이한결이 단숨에 들이키자 류페이치가 작은 잔 대신에 맥주잔에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건배사도 부탁합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한결이 잔을 들고 서툰 중국어로 말했다. 고량(高粱)과 고양(高揚)의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이 순간 떠올랐다.
“喝下这杯高粱酒, 让我们高扬东亚的和平, 干杯!(이 고량주를 마시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고양합시다, 건배!)”
“이 소장님과 장 교수님을 10월 진먼대에서 열리는 평화학술대회에 초청하고 싶습니다.”
류페이치가 두 사람을 배웅하면서 말했다.
“저희도 류 소장님을 한국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9월에 부산에서 동아시아 평화회의가 있거든요.”
이들은 재회의 약속을 담은 악수를 나눴다.
“오늘 만찬에서 술을 대접할 수 없게 되어 아쉽게 생각합니다.”
샤먼대로 돌아온 이한결과 장승희를 환영하기 위해 마련된 만찬 자리에서 부총장이 말했다. 그는 중국 정부가 공식적인 자리에선 ‘금주령을 지키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덧붙였다.
“이미 진먼도에서 충분히 마셨습니다.”
이한결이 58도짜리 낮술과 초여름 햇볕에 붉어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베이징에선 한국인이 양안 문제를 거론하는 것을 내정 간섭이라며 기피했는데, 이곳에선 분위기가 다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접경지역이라 샤먼 사람들은 양안 간의 평화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부총장의 말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이한결은 베이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 전문가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중국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핵심 이익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역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중국의 한 전문가는 “그건 양안 문제를 국제화하는 것”이라고 발끈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한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중국과 대만 사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저는 미국 사람들과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얘기를 나눈 바 있습니다.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와 주일미군을 투입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중국의 여러 전문가와도 얘기를 많이 나눠봤습니다. 하나같이 대만 사태 발생시 주한미군이 투입되면 중국은 주한미군기지를 공격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이게 무엇을 뜻합니까? 저는 이 문제를 20년 넘게 관심을 가져왔어요. 중미관계나 양안관계가 잘되면 이런 걱정도 안 하겠지요. 그런데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이곳에 왔고, 그 두려움을 공유하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일방적 두려움은 적대감을 키우지만, 공유된 두려움은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다음날 샤먼대 양안관계 전문가들 10여 명과의 간담회 자리. 이한결은 방문 취지를 설명했다.
“저는 민간 차원에서라도 동아시아의 여러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포럼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념과 국경을 초월해 우리는 동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선 말입니다.”
하지만 샤먼대 학자들로부터 포럼에 참여할 뜻이 있다는 확답을 얻지는 못했다. 간담회가 끝나고 한 학자가 배웅하면서 말했다.
“양안 문제를 국제화하는 것은 중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무리 민간인이라고 해도 난처할 수밖에 없는 자리니까요.”
장승희와 이한결은 샤먼대 교정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우리가 부질없는 짓을 하는 걸가요?”
이한결이 쓴웃음을 짓자, 장승희는 말했다.
“양안문제를 동아시아 평화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가급적 양안이나 대만해협을 언급하지 않고 동아시아라는 맥락에서 양안문제를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
[글쓴이 주]
2027년 중국과 대만의 충돌, 미국의 개입, 그리고 한국·조선·일본·러시아 등이 엮여 있는 동맹의 체인이 맞물려 고조되는 동아시아 전쟁 위기, 위기를 지나 재앙으로 치닫는 기후변화, 그리고 배타적이거나 공유된 두려움…. 이들이 빚어 내는 대서사를 ‘리얼픽션’ 행태로 써 내려갑니다. 리얼픽션 '더 체인(the chain)'은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과 곧 일어날 수 있는 미래를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필자가 도전해 본 영역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지난 줄거리
대만 해협의 포성은 거대한 전쟁의 서막에 불과했다. 미중 함대가 동아시아로 집결하며 일촉즉발의 상황,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진짜 위기는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다. 수화기 너머,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일본이 북한 미사일을 요격한 순간, 그것이 완벽하게 설계된 함정의 시작이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전쟁 행위'라는 북한의 섬뜩한 선언과 함께 동해에 나타난 러시아 함대. '사라예보의 총성'이 동아시아에서 재현되면서, 일본은 80년 만에 다시 전쟁이라는 악몽과 마주하는데...
북한 김정훈 위원장은 “조중우호 관계를 과시하면서도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게 할 방법”을 찾고자 한다. 미국은 대만 해협이 위기 상황이면 전투기, 핵항모 등 군사력의 입출입을 남한에 요구해 왔다. 최서희 대통령은 미국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분쟁에 연루되지 않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이 순간 최 대통령에게 전화 한 통이 오는데...
중국과 대만의 해상 대치 이틀째. 중국에 가까운 대만의 섬, 금문도에 있는 진먼대 류 교수는 서둘러 공항으로 이동했지만 공항은 폐쇄된다. 대만 라이창더 총통이 내린 비상명령권 발동에 대해 입법원의 승인 선거로 대만 정국은 국민당과 민진당으로 나눠져 혼란스럽다. 대만 전역에 사이렌이 울리고, 수백 기의 드론이...
대만 중국 군사 충돌 위기 리얼픽션. 이 시각, 한 일간지 신문의 편집국장, 기후팀장, 국방팀장이 회사 앞 술집에 모였다. 당초 초대형 태풍 발생 급증을 다룬 기사가 머리기사였다가 급하게 바뀌었다. 중국이 대만 땅 진먼다오에 샤진대교를 연결하겠다는 발표와 대만이 실력 저지하겠다는 소식으로 교체되었다. 중국이 회색지대 전술로 부전승을 노렸다며 중국의 의도, 대만의 응전, 미국의 개입을 조망한다.
평화연구소 소장 이한결이 2005년 미국 펜타곤을 방문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과 대만 문제를 논의하며, 제주 해군기지와 평택 미군기지 이전 갈등 속에서 한국의 안보 딜레마를 고민한다.

정욱식 평화네크워크 대표,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핵과 전쟁이 없는 세상,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평화를 상상하고 궁리해 온, 평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6~2007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방문학자로 한미동맹과 북핵문제를 연구했다. 20여년 동안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군축⸱반핵⸱평화체제를 천착한 공로로 리영희상(2020)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과 평화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다. 『청소년에게 전하는 기후위기와 신냉전 이야기』(2023),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2023), 『미중 경쟁과 대만해협 위기』(2022), 『흥미진진한 핵의 세계사』(2020), 『김종대 정욱식의 진짜안보』(공저, 2014) 등 40여 권의 저작이 있다.
흥미진진 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