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구조적 설계로 시민 참여 유도해야
- Theodore
- 2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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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8 최민욱 기자
기후위기 시대, 탄소중립을 위한 정책 설계에서 시민의 역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프랑스, 스페인, 핀란드, 일본, 서울의 사례는 시민이 정책을 직접 설계하고 실행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마련할 때 비로소 기후행동이 일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지금은 시민참여의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할 때다.
하향식(top-down) 정책의 한계, 시민 없는 전환은 실패한다
도시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약 70%를 차지하는 공간으로, 에너지 소비와 교통, 산업, 건축 등 다양한 배출원이 집중되어 있다. 전 세계의 각 도시는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저탄소 도시로의 전환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받아들이고 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고탄소 기반의 도시 시스템이 저탄소 친환경 구조로 전환되는 전 과정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절약, 소비 제한, 교통 방식 변화 등 일상이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의 하향식(top-down) 정책이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이유다.
시민들의 자발적 동의와 참여 없이 정책은 실현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시민이 직접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의 기반 시설과 탄소 감축 계획에 개입하고, 생활 속 행동으로 실천하며, 정책 형성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 지속가능한 도시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정책 수용성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도시 환경에서 공동체의 책임과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정책 수용자에서 정책 제안자로, 프랑스 기후시민회의
시민 참여 활성화의 전제 조건은 정부와 시민 간 상호 신뢰 구축이다. 이를 위해 정책 결정 과정 전반에 걸쳐 투명성을 확보하고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기후변화의 심각성, 지역의 온실가스 배출 현황, 관련 정책 등에 대한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정보 제공이 필수적이다. 시민들이 정책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자신의 역할을 인지할 때 자발적 참여가 가능해진다. 정부는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정책이 실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시민 참여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지속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형식적인 공청회나 설명회를 넘어 시민들이 목소리를 경청하고 실질적인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소통 창구가 필요하다.

프랑스는 2018년 유류세 인상에 반발한 ‘노란 조끼 운동’ 이후, 시민의 신뢰 회복과 사회적 합의를 위한 새로운 정책 실험으로 ‘기후시민회의’(Convention Citoyenne pour le Climat)를 도입했다. 노란 조끼 운동(Gilets Jaunes)은 2018년 11월, 프랑스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의 일환으로 발표한 유류세 인상 정책이 농촌 지역과 저소득층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일어났다. 참가자들이 노란색 안전 조끼를 입어서 붙여진 이 사건은 정부의 일방적인 기후정책에 대한 시민들이 저항한 대규모 시위 사태다.

2019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주도한 '기후시민회의'는 무작위 추첨을 통해 전국에서 선정된 150명의 시민으로 구성되었으며, 회의는 약 9개월간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교통, 주거, 소비, 식생활, 노동 등 5대 분야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전문가 강연과 질의응답, 소그룹 토론을 거쳐 총 149개의 정책 제안을 도출했다. 제안 내용은 고속도로 제한속도 하향, 에너지 리노베이션 의무화, 항공편 세금 인상, 채식 식단 확대, 친환경 제품 광고 강화 등 실생활과 밀접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이 중 146건이 정부에 제출되었고, 2021년 ‘기후 및 회복탄력성 법안’으로 일부가 입법화되었다.
우리는 결정한다, 바르셀로나 시민 플랫폼 Decidim
실질적인 시민 참여는 모든 시민이 의사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시민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행정 시스템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위원회와 간담회를 통한 의견 청취, 설문작성 등 간접적인 참여 방식에서 벗어나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Decidim(Decidim 공식 웹사이트)은 바르셀로나시가 2016년부터 시작한 오픈소스 기반 디지털 참여 플랫폼으로 시민들이 시정계획 수립, 공공 예산 편성, 조례 제정, 공청회, 정책 실행 감시 등 전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Decidim은 카탈루냐어로 ‘우리는 결정한다’는 뜻이다. 바르셀로나시는 2016~2019년 시정계획 수립에 Decidim을 활용해 약 4만 명의 시민으로부터 1만 건이 넘는 제안을 수렴했고, 이 중 약 8천 건이 채택되어 실행되었다. 시민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정책을 제안하고, 다른 시민들과 토론하며, 의제별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정책 제안이 채택된 이후에는 이행 여부, 진행 상황 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어, 거버넌스 투명성과 책임성이 획기적으로 강화되었다.
Decidim은 이후 핀란드 헬싱키, 캐나다 몬트리올, 멕시코시티, 이탈리아 볼로냐 등 400개 이상의 지방정부와 시민단체에 도입되었으며, 유럽연합(EU) 디지털 공공혁신 사례로도 소개되었다.
하이브리드형 시민의회, 일본형 기후 거버넌스

일본에서는 유럽형 숙의 민주주의 모델을 참고하여 시민참여 기반의 기후정책 실험이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020년 삿포로시에서 열린 ‘기후시민회의 삿포로 2020'은 일본 최초의 기후시민회의로, 무작위로 선정된 시민 20명이 전문가의 지원을 받아 기후변화 대응 정책을 숙의하고 제안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들은 교통, 에너지, 식생활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영역에서 온실가스 감축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숙의을 통해 16개의 정책 제안을 도출했다. 삿포로시는 이를 향후 기후계획 수립에 반영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시민회의 구성과 운영에는 홋카이도대학교와 시민단체, 연구기관이 함께 참여해 과학 기반의 토론과 민주적 정당성을 높였다.
일본 나고야시의 '하이브리드형 시민회의'는 이해관계자, 전문가, 시민, 공무원이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구조로 도시계획과 기후정책을 공동 설계하고 있다. 이 모델은 단순한 의견 수렴을 넘어서 이해관계자 간 협의와 역할 분담을 통해 정책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개인 탄소 하베스트, 핀란드 시민참여 모델
'개인 탄소 하베스트' 개념은 개인의 탄소 감축 노력을 '수확'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센티브와 연계하여 자발적 실천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핀란드 라히티시는 2019년부터 ‘CitiCAP 프로젝트’를 통해 개인의 이동 패턴에 따른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고, 감축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는 ‘개인 탄소 하베스트(Carbon Harvest)’라는 개념을 도입한 첫 사례로, 시민의 행동 데이터를 디지털로 수집하고 이를 보상 시스템과 연결해 자발적 실천을 유도한다.
참여 시민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이동수단(자동차, 버스, 자전거, 도보 등)에 따른 탄소 배출량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일정 수준 이상을 감축하면 지역 통화 또는 할인 쿠폰 등의 혜택을 받는다. 이 시스템은 시민의 일상적인 탄소 감축 행동을 ‘수확’ 가능한 가치로 환산하는 방식으로, 시민이 단순히 정책을 ‘따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데이터를 제공하고 행동을 설계하는 공동 생산자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라히티시는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 EU의 ‘스마트시티 이니셔티브’ 및 ‘그린딜’ 프로젝트와도 연계하고 있으며, 향후 유럽 전역에 적용할 수 있는 시민참여형 탄소감축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과 탄소 예산, 지역 경제가 결합된 거버넌스 혁신 사례로 평가된다.
인센티브에서 구조적 전환으로, 서울시의 시민참여 과제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적절한 인센티브 제공이 탄소감축 행동 참여의 효과적인 동기가 될 수 있다. 개인의 탄소 저감 노력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때 참여 동기가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2009년부터 '에코마일리지'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가정과 기업이 자율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면 마일리지를 지급하는 인센티브 제도로, 2023년 기준 약 245만 명이 참여했다. 2024년부터 시행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2024~2033)’에 기반해 시민제안 공모, 주민참여예산, 탄소중립 시민 아카데미 등 시민참여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다. 자치구 단위의 ‘탄소중립 시민협의회’ 와 서울형 시민회의 도입도 시도했다. 2021년 서울시는 1081명의 시민과 약 100일 간 서울시민회의 토론를 진행한 바 있다. 497개의 아이디어가 제안됐고 서울시 기후환경본부와 외부 환경 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25개의 우수제안 후보를 뽑았다. 25개 우수제안 후보를 대상으로 모바일 투표를 거쳐 다득표를 받은 11개 제안을 최종 선정했다.
그러나 서울시민회의에서 시민들이 제안한 11개의 정책이 실제로 시정에 반영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찾지 못했다. 시민들이 제안한 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보 제공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시민참여의 신뢰성을 높이고,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시민은 단순 정책 수용자가 아니라 실천의 주체이자 정책의 설계자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적 설계가 있어야 한다. 시민참여의 실질화를 위한 제도적 재설계는 시민이 정책 소비자가 아닌 정책 설계자, 실행 파트너라는 인식전환에서 시작된다.
시민참여 구조가 변해야 도시가 변한다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한 저탄소 회복탄력성 도시 구축은 시민의 실질적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시민은 정책의 수용자가 아니라 실천과 설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는 선언적인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제도적 장치와 디지털 기반, 인센티브 설계가 종합적으로 결합된 구조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프랑스, 스페인, 일본, 서울의 사례는 시민이 정책 과정에 참여하고, 그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되며, 이에 따른 행동이 보상되는 구조가 마련될 때 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은 현실이 된다.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 제정 이후, 지방정부 중심의 기후정책 설계와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으나, 이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제도화할 것인지는 향후 가장 중요한 정책적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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