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봄이 든 큰 추위, 대한


2026-01-23 배이슬

"입춘으로 시작해 대한으로 끝나는 24개의 절기에 하나씩 점을 찍었더니 다시 입춘, 작은 원이 그려졌다. 씨앗이 싹트고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농사를 지으며 깨닫는 시간의 흐름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봄을 품은 큰 추위, 대한. 소한에 멀쩡하던 것들도 이번 대한에는 다 얼게 생겼다. 사진_배이슬
봄을 품은 큰 추위, 대한. 소한에 멀쩡하던 것들도 이번 대한에는 다 얼게 생겼다. 사진_배이슬

소한의 얼음이 녹는다던, 대한


대한은 큰 대(大), 찰 한(寒)을 써서 ‘큰 추위’라는 뜻이다. 이름과 다르게 대한은 다시 입춘과 연결되는 때다. 덕분에 작은 추위라는 소한에 깊은 추위로 겨울의 정점을 찍고 나면, 대한에는 되레 날이 풀린 듯 덜 추운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름과 달리 소한이 더 춥고 대한이 덜 추운 것을 담은 속담들이 많다. “소한의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라거나 “대한 끝에 양춘 있다”,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처럼 말이다. 이름과 달리 더 추운 소한에 얼었던 얼음이 되려 큰 추위라는 대한에 녹을 만큼 날이 풀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올해는 소한에 얼지 않았던 것들도 대한에 꽁꽁 얼었다. 진작에 얼었던 땅이 대한에 든 봄에 녹아야 하는데, 올해는 소한에 덜 춥다 했더니 대한에 땅이 얼었다. 이름대로 추워져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매년 올라가는 겨울의 기온 사이 예기치 않은 때 드는 한파를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이 된다.


한 해를 매듭짓고 다시 시작하는 대한 즈음에 드는 한파로 몸도 마음도 한껏 움츠러들기 쉽다. 대한이 지나면 다시 입춘이 올 것이다. ‘대한 끝에 양춘 있다’는 말 대로 대한은 겨울의 끄트머리이자 새로운 시작을 세우는 봄의 연결이다. 예상치 못한 대한의 짙은 냉기지만, 큰 고난과 추위 끝에는 결국 봄이 온다는 속담 속에 든 입춘을 본다.

     

섣달, 설을 밑도는 달


대한은 양력으로 1월 20일 전후에 들지만, 음력으로는 그제야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음력으로 12월은 섣달, 설을 밑도는 달이라는 뜻이다. 대한이 지나 다시 입춘으로 시작하는 삶의 리듬에서 대한과 입춘은 내내 다가올 설을 준비한다. 들깨를 가려 기름을 짜다 놓고 두부를 만들 콩을 가린다. 대한과 입춘 사이는 할머니들에게는 1년 농사지은 것의 의미가 담기는 때다.


“식구들 먹일라고 농사짓지.” 굽은 허리와 튀어나온 손마디에도 농사를 짓는 할머니들에게 왜 농사짓냐 물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이렇게 답한다. 속도 모르는 자식들은 거동도 불편하신데 사다 먹으면 되지 뭘 자꾸 하냐며 타박한다. 온갖 타박과 걱정을 들어가면서도 끝내 할머니들이 농사를 짓는 이유다. 한 해 애써 기른 것들로 가족들을 돌보고, 사다 먹는 것에는 담길 수 없는 것들을 먹이고 실어 보낼 때 한 해 농사의 보람을 거두고 삶의 의미가 생생해지기 때문이다. 대한 즈음의 기억에는 늘 그렇게 할머니들이 집집이 품앗이하며 함께 설을 준비했다.


"식구들 먹일라고 농사짓지." 설을 맞으며 일년 내내 애쓴 보람을 맛보는 날이다. 사진_배이슬


어릴 때 기억에 아랫목에서 콩가루로 반죽한 콩 유과를 말리느라 뜨끈한 방바닥에 꼬순내 맡으며 함께 잤다. 그렇게 며칠을 말렸다가 명절에 튀겨 콩 유과를 만들었다. 설날이 오려면 멀었지만 집집이 술을 담고 두부를 만드느라 서로 손 보태가며 바빴다. 긴 시간 들여 설을 맞았다.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집의 자식들이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았고, 명절에는 집에 오는 모든 손님들을 신나게 먹이셨다.


평생을 농사지어도 그 일로서 어딘가에서 존중받는 일이 드물었다. 어디에 비싼 값으로 팔아서 누군가 평가해서 인정해 주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이어온 것이 가치 있고 식구들 먹이는 것으로 농부로서의 시간을 그날에 잘 먹는 입과 밝은 웃음으로 한 해 농사를 인정받는 일이었다.


신년이 밝았다. 해넘이와 해돋이 타종 행사로 떠들썩했지만, 농부에게는 아직 새해가 멀었다. 친구들이 종종 음력으로 생일을 찾는다고 옛날 사람이세요? 하고 놀리듯 말한다. 어쩌면 옛날 사람이 맞구나 싶은데 그렇게 농부의 해넘이이자 해돋이인 구정이 와야 한해가 시작되는구나 느껴진다. 섣달에 드는 대한은 그렇게 새해를 준비하고 맞는 시간이다.


대한의 농살림 _ 씨앗을 잇는 마음


부지런한 농부는 대한부터는 벌써 씨앗 낼 준비를 한다. 비닐하우스가 지천인 세상이라 하루라도 더 일찍 키워 많이 수확하고 값을 크게 받기 위해서다. 겨우내 보관해 두었던 씨감자, 씨고구마, 야콘 관아, 생강 등이 썩거나 얼지 않았나 들여다보는 때다. 날이 풀리면 씨앗 받으려고 따로 챙겨둔 당근과 무, 배추도 들여다본다.


근래에는 겨울바람도 매서워서 양파와 마늘을 덮어놓은 밭의 부직포도 다시 든든히 챙긴다. 날이 추워 줄기에 힘을 적게 가지고 있는 1월과 2월 사이에 숲밭과 블루베리 나무의 가지치기도 한다. 설날쯤부터는 일찍이 촉을 틔울 고추, 가지 씨앗도 냉장고에 두었다면 일찍이 내어둔다. 볍씨를 쟁여 둔 창고도 가장 추운 날에는 문을 활짝 열어 추위가 한번 들도록 한다. 창고 안에서 쥐가 맛보고 습기가 쌓였을지 모르는 창고 안 볍씨에게도 겨울을 전한다.


대한에는 설을 맞으며 갈무리해 둔 귀한 것들을 내어 먹으며 다시 한 해 동안 기를 것들을 준비한다. 어느 밭에 무엇을 심을지, 얼마나 심을지, 작년을 보내며 한 해 또다시 달라진 기후와 몸, 먹고사는 꼴에 맞춰 농사를 계획한다. 힘에 부치면 쉬어가는 밭을 늘리기도 하고 욕심이 나면 한 해에 두 종류 이상의 호박, 옥수수 씨앗을 받아보려고 궁리를 한다. 씨를 받지 못한 것은 나눠 줬던 친구에게 물어 씨를 이어 심기도 하고, 새로 얻은 씨앗을 함께 심자고 나누기도 한다. 대한의 농사는 씨앗을 나누고 잇고 정리하는 때다.


씨앗을 잇는 마음. 씨앗을 나누고 나눔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농부씨앗을 하나씩 건네는 일이 아닐까. 사진_배이슬


계속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토마토, 고추, 가지 같은 것들이야 기르는 날이 길어질수록 일찍부터 많이 딸 수 있다. 다만 그러자면 추위에 약한 작물들이 버틸 수 있을 만큼 불을 때거나 빛을 쬐어 줘야 한다. 작년 1월 폭설에 하우스가 주저앉은 것을 핑계 삼아 부러 일찍 모종을 내지 않으려고 한다. 지난 5년을 돌아보면 비슷한 시기에 씨앗을 내지만 자라는 기간이 더 짧아졌다. 예기치 못한 5월 7일 만상일 이후에도 드는 추위에 모종들이 얼어 죽는데 빨리 컸다고 빨리 내다 심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씩 늦춰 모종을 내거나 본밭에 심는 것으로 조금 적게 더디 먹더라도 마음 졸이는 일을 줄이기로 했다.


올해도 제주에서 윰이 보내 준 히비스커스 씨앗, 홍동에서 짱돌이 다시 나눠 준 토마토씨앗, 창원에서 혜리가 수집한 토종흰들깨 씨앗, 발리에서 사유가 나눠 준 꽃 씨앗, 유이가 나눠 준 멕시코 고추씨앗까지. 우리를 먹여 살리는 다양성 그 자체인 씨앗들이 모아졌다. 씨앗을 나누는 마음을 잘 알기에 씨앗에 담긴 마음과 함께 잘 심을 궁리를 한다. 대한이면 농부는 마음으로 이미 수백 번 씨앗을 심어 보는 때다.

     

[사진4번 6장]

대한 지나 농살림 _ 정월달 장담그기


섣달 지나 정월달이 오면 장을 담는다. 정월달이 오면 입춘이 지난 다음이겠지만, 대한부터 잘 띄워 말린 메주도 들여다보고, 여러 해 간수를 뺀 묵은 소금도 져다 날라둔다. 추운 날에 담은 고추장과 달리 날이 풀리는 정월달에는 된장, 간장을 담는다.

정월달 장담그기. 대한이 자나고 입춘이 지나면, 장을 담는다. 달걀을 넣고 소금물 진하기를 살핀다. 사진처럼 달걀이 동동 뜨면 된다. 사진_배이슬


메주를 씻어 물기를 빼고, 소금을 대소쿠리에 면포를 깔고 담는다. 천천히 물을 부어가면 소금을 녹인다. 장맛이 제일 좋은 장독 크기에 딱 맞게 다라이에 내내 물을 붓는다. 염도를 맞춰야 하니 제법 물이 차면 신선한 달걀을 띄운다. 할머니는 “계란이 옆으로 누워서 요마만치 물 우로 뜨게 해야 혀”라고 설명했다. 이미 받힌 소금물을 다시 끼얹거나 물을 더해서 달걀이 적당히 뜨면 소금물이 준비된다.


장독에 메주를 깨지지 않게 살포시 넣고 소금물을 붙는다. 할머니는 기다란 다시마도 넣고 말려 둔 고추도 넣었다. 겨울이라 구들에 불 때던 참나무 장작이 다 타서 지글지글 숯이 되면 숯도 넣었다. 그렇게 하얗던 소금물은 된장이 우러나 까매지고, 메주는 풀어져 보들보들해진다.


할머니는 “진달래꽃 핀 게, 장 갈러야 혀” 했다. 진달래가 필 만큼 마을의 기온이 따뜻해졌다는 뜻이다. 근래에는 두서없이 꽃이 피니 정월달에 담근 장은 3월 즈음에 장을 갈랐다. 메주는 건져내어 다복다복 공기 없이 장독에 채워 된장이 되고, 남은 소금물은 간장이 되었다. 애껴 먹던 가장 맛있는 간장독에 새 간장을 더해 두면 영락없이 맛있어지곤 했다. 다시 장 담그는 때가 오고 있다.


기후월령가를 마치며 _ 24개의 점을 찍어보니 작은 원이 그려졌다


24절기는 지구의 1년이라는 시간에 태양이 지나는 길을 15도씩 나눈 24개의 이정표다. 태양이 15도씩 지나갈 때마다 농부의 시간이 달라지는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기후월령가를 썼다.


입춘으로 시작해 대한으로 끝나는 24개의 절기에 하나씩 점을 찍었더니 다시 입춘, 작은 원이 그려졌다. 씨앗이 싹트고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다. 농사를 지으며 깨닫는 시간의 흐름은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원을 그리며 나아간다. 씨앗이 씨앗으로 돌아오고, 농부는 다시 씨앗을 가르며 봄을 바라보듯이.


씨앗에서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듯이, 대한에서 다시 입춘으로. 사진_배이슬


24절기는 농부의 동그란 시간이다. 24절기가 과거의 농사를 위한 지침서였다면 현대에는 지구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기준점이 되었다. 2월에 불던 영등할매바람이 삼월, 사월에도 불어대고, 소서 무렵 지던 장마가 맑다던 추분에도 가을장마가 지는 일이 잦아진다. 소한의 추위는 대한에 오는 것처럼 말이다.


오랜 시간 관찰하고 기록되어 온 24절기의 이야기들과 할머니들의 입말들을 통해 인간들이 지구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 돌아보게 되는 거울이 된다. 기록과 이야기가 하나씩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은 나아가 사람만큼이나 논밭의 많은 생명들도 혼란스러워 한다는 뜻이다.


 삶을 직접적으로 지탱해 주는 ‘농사’와 ‘농촌’이 먼 이들에게 24절기는 그런 망가진 ‘지구의 리듬’과 땅에 뿌리내 살던 ‘사람의 리듬’을 다시 감각하게 하는 이정표 같은 것이 아닐까. 일상에서 24절기를 찾아 제때를 찾아 느끼다 보면 잊고 살던 ‘철’이 들 것이다.


할머니와 10년을 넘게 농사를 지으며 배우고 새기고 느낀 것들은 할머니가 계시지 않고서야 철을 찾고 있다. 할머니가 계실 때는 늘 듣던 일상의 언어들을 다시 떠올리고 기록하는 일은 이미 너무 많이 사라져 버린 이 땅 위 삶의 지혜를 지키는 일이었다. 마주하기 어려우면서도 잊어버리게 될까 두려운 것을 보름마다 되짚어가며 마침내 작은 원 하나를 그려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촌에 살지 않아도 겨울의 끝에서 봄을 걱정하며 그리는 모든 이에게 빠르게 직선으로 긋는 시간보다 둥글둥글 ‘다시’를 그릴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기후월령가를 마치며. 둥근 시간의 회복. 사진_배이슬


연재 보기

대서, 염소 뿔이 녹는다는

처서, 모기 입이 삐뚤어지는

댓글

별점 5점 중 0점을 주었습니다.
등록된 평점 없음

평점 추가

ㅇㅇㅇ

회원님을 위한 AI 추천 기사

loading.jpg

AI가 추천 기사를
선별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추천 기사를
선별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추천 기사를
선별중입니다...

유저별 AI 맞춤 기사 추천 서비스

로그인한 유저분들께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이 기사를 읽은 회원

​로그인한 유저들에게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로그인 후에 이용 가능합니다.

이 기사를 읽은 회원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유저 찾는중..

​로그인한 유저분들께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유저별 AI 맞춤
기사 추천 서비스

로그인한 유저분들께만
제공되는 기능입니다.

​ㅇㅇㅇ

회원님을 위한 AI 추천 기사

loading.jpg

AI가 기사를 선별하는 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기사를 선별하는 중입니다...

loading.jpg

AI가 기사를 선별하는 중입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