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날 풍경ㅣ우리의 1980년대 ② 격렬한 시대와 86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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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9일
- 5분 분량
2025-09-19 최은
‘80년대’와 ‘86세대’란 명칭을 정의해 보자. ‘80년대’는 80년 광주학살 당시 전남도청의 시민군이 진압되는 순간에 시작해서 91년 강경대군의 죽음로 촉발된 12명의 희생으로 마무리되었다. ‘86세대’는 이 10여 년간 대학을 다닌 200만 학생이다. 운동을 조직한 이들도 있지만 시위에 적극적이지 않아도 학생운동 진영의 생각을 알고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 두터운 층이었다.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80년대'는 전남도청의 시민군이 진압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정의내려야 할 것은 ‘80년대’라는 시대와 ‘86세대’라는 명칭이다. ‘80년대’라는 말이 1980년 1월 1일부터 1989년 12월 31일까지 10년의 시간을 지칭한 것이라면, 우리가 굳이 이 시대를 조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을 견뎌 낸 평범한 학생운동가 출신으로서 나에게 ‘80년대’란 정확히 1980년 5월 26일 전남도청에서 윤상원을 비롯한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이 잔혹하게 진압된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시대의 끝은 1991년 4월 명지대 강경대군의 죽음으로 촉발된 대규모 시위사태가 12명(성균관대 김귀정과 전남대 박승희를 비롯한)의 희생을 불러왔음에도, 마무리된 순간이었다.
서울대 77학번이자, 이른바 ‘무림사건’의 주동자로 고초를 겪은 문학평론가 김명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책 『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김명인 회성록』(돌베개, 2025) 역시 광주에서 벌어진 항쟁과 학살이 얼마나 압도적인 충격을 주었는지 잘 묘사했다. 아직도(어쩌면 영원히)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이 비극 이후, 진정한 80년대가 시작되었다.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이란 두 가지 코드
이 시대를 다룬 거의 유일한 통사(通史)격인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인물과 사상사, 2003)에서 그는 두 개의 코드를 제시한다.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전자가 군사정권의 폭정에 맞선 저항과 투쟁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결국 이 시대의 진정한 승자가 된 ‘독점자본주의체제의 공고화’를 의미한다. 전자가 87년 6월항쟁을 변곡점으로 삼아 이른바 ‘제6공화국체제’(우리가 흔히 87년체제라고 하는)를 낳게 했다면, 후자는 80년대 후반기 ‘3저호황’(요즘 분들은 꿈에도 상상 못할 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이후 완연히 중진국 반열에 오르게 했다. 45년이 지난 지금, 회고해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지금 꼴을 갖추게 된 주형(鑄型)은 이때 완성된 것이다. 우리는 아직 87년 체제에 살고 있고,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의 말석에 올랐다.
광주의 비극은 86세대에게 끝없는 자책과 분노의 샘
만일 단 한 마디로 이 시대를 정의해보라면, 나는 ‘격렬한 시대’였다고 말하고 싶다. 정말 너무나 격렬했다. 쿠데타와 학살을 통해 집권한 군사정권은 언제든 철권통치로 회귀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두 번이나 계엄령을 발동하려 했다. 1986년 12월 초, 이른바 ‘건대항쟁’이 진압된 후, 그리고 87년 6월 19일 즈음. 그가 왜 마지막 순간에 발동을 철회한 것인지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미국의 압력과 실제 발동 후 반드시 발생할 민간인 피해에 대한 정치적 부담, 그리고 역쿠데타에 대한 두려움 등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에 맞선 학생운동 진영 역시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86세대는 80년 ‘서울의 봄’과 ‘서울역 회군’이라는 경험 속에서 언제든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처절한 희생으로 끝난 광주의 비극은 86세대에게 끝없는 자책과 분노의 샘이었다.
"비극을 물려줄 수는 없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훌쩍 흘러 44년 후, 12,3 내란의 밤에 나와 같이 여의도로 몰려간 86세대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은 ‘여기가 죽을 자리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더 이상 이 비극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단호한 결의였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머리가 허옇게 변한 초로의 벗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한 말이다. 이런 감정과 생각들은 87년 6월 항쟁의 한 복판에서 위에 언급한 군사정권의 쿠데타 시도에 맞서 학생회관 농성에 돌입한 밤 이후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만용에 가까운 결기로 가득 찬 수백 명의 동지들이 버틴 그 밤을 보내고 새벽녘에 기숙사로 돌아온 순간, 그제야 내가 지금 말 그대로 ‘골로 갈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의 계엄령(1980년 5월 17일과 2024년 12월 3일) 사이 4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너무나 다행히도 맑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했던 바, ‘역사적 사건은 반복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난다’(대충 이런 뜻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부 망명자’에 불과한 내가 굳이 80년대와 86세대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기로 마음 먹은 계기도 12월 3일 밤이다.
'86세대', 10년간 대학을 다닌 200만 명의 학생
그렇다면 두 번째 정의. 이 시대를 살아낸 86세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사실 과거에는 이 용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에서 처음 386세대라는 호칭을 붙였을 때, 우리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일단 조선일보라는 점, 386컴퓨터(요즘 분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구닥다리가 된)에 비유된다는 점. 그럼에도 일반화된 이 규정에 따르면 80년대에 4년제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들이다. 좀 넓혀보자면, 1950년대 끄트머리에 세상에 나온 분들과 1970년 초반에 태어난 분들까지 포함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세대 규정에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전문대를 나온 분들, 아예 대학을 가지 못한 분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는 학생운동이라는 관점에서 굳이 이 규정을 따르려 한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1980년 4년제 대학 입학생은 10만3951명이었다. 졸업정원제로 입학인원이 크게 늘어난 81년부터 그 숫자는 20만 명 언저리에 이른다. 전국의 4년제 대학 숫자는 대략 1980년 84개에서 1990년 104개로 증가했다. 출생자 수가 100만 명 언저리인 것을 감안하면, 4년제 대학의 진학률은 1980년 9.9%에서 81년 이후 대략 20%선으로 나타난다.
1970년대의 대학생이 입학만 하면 엘리트라고 해도 될 정도로 희소했다면, 80년대의 대학생이란, 성장하는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으로 가는 티켓을 쥔 계층이라고 할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매년 인구가 대전 인구만큼 늘어나는(80년대의 대전은 대략 60만 언저리였다) 시대였다. 그러니까, 86세대는 흔히 하는 말로 ‘백만 학도 총궐기’라는 표현이 크게 틀리지 않을 만큼 대학생의 숫자가 늘어난 첫 번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2023년 통계를 보면 전국 190개 대학에 30만9763명이 입학했고 진학률은 무려 64.9%였다.
그 10년간 4년제 대학을 다닌 거의 2백만 명의 대학생들이 이른바 86세대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많은 학생들이 다 데모꾼(?)이 되지는 않았을 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생운동 진영에 뛰어든 것일까? 실제로 80년대 초반에 학내 시위가 강제 진압되기 일쑤인 상황에서 한쪽에선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쌍쌍파티를 즐기던 시대였다. 학내 데모와 가두투쟁이 일상화된 중반 이후에도 자기는 단 한번도 데모에 가담한 적이 없다는 학생들이 무수했다.
다만, 전반적으로 대학가의 분위기, 관심이 학생운동에 집중되었다는 점. 학내 게시판의 대자보(고색창연한 표현이겠지만)가 학내 여론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는 점. 적어도 대학생 다수가 학생운동에 우호적이고, 실제로 6월 항쟁과 같이 전면적인 시위가 발생할 경우, 너무나 당연히 도서관과 강의실이 텅 비는 게 일상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운동을 지지하는 두터운 층과 20만의 단호한 운동가란 희망
굳이 운동권(학생운동진영을 폄하하기 위해 정권 측이 내놓은 표현)과 비운동권을 명확히 가른다는 것은 웃기는 얘기다. 대부분의 신입생들이 입학하고 거치는 학생회 혹은 학회의 학습을 통해, 학생운동 진영의 생각들이 일종의 교양이 되었다.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 않더라도,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두터운 층이 형성된 셈이다. 이런 광범위한 기반이 폭발한 경우가 87년 6월항쟁이었다. 연세대에서 이한열이 최루탄에 직격된 6월 9일, 전국적인 교내 시위가 벌어진 상황에서 놀랬던 것은 기껏해야 천, 2천 정도였던 집회인원이 거의 6, 7천명이 된 순간이었다. 거의 모든 대학교가 비슷한 상황이었고 서울대는 1980년 5월 이후 처음으로 1만 명에 육박하는 숫자가 집회에 참가했다. 그날 우리는 이 싸움이 승리할 수도 있다는 희미한 확신이 생겼다. 보수적으로 잡아도 매년 입학하는 학생들의 10% 이상이 학생운동 진영의 조직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매년 적어도 2만 명 이상, 10년이면 20만 명의 단호한 운동가들이 이 세대의 핵심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단히 착각했다. 뛰어난 지도자들, 풍부한 인력 자원, 단호한 조직이라면 변혁운동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착각. 지금 나이로 따지면, 대략 55세에서 65세쯤 되는 이 세대가 성장해서 사회를 바꾸고 말 것이라는 착각.
의기(義氣)는 높았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조만간 아주 철저하고 거대한 실패를 맛보게 될 운명이었다. 1991년 4월 이후, 우리 세대의 운동가들 대부분이 청산과 변신을 거듭하며, 체제의 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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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그래서 우리는 단단히 착각했다. 뛰어난 지도자들, 풍부한 인력 자원, 단호한 조직이라면 변혁운동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착각. 지금 나이로 따지면, 대략 55세에서 65세쯤 되는 이 세대가 성장해서 사회를 바꾸고 말 것이라는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