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슬의 기후월령가 | 모기 입이 삐뚤어지는, 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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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2일
- 6분 분량
2025-08-22 배이슬
"기후가 달라질수록 할머니가 농사지었던 때처럼 더 늦게 씨를 뿌리고, 미리 만든 두둑에 유기물 두텁게 깔아 땅이 뜨겁거나 마르지 않게 보살핀 뒤에 배추를 심는다. 도고통벌레도 먹고 배추흰나비도 먹고 나도 먹고도 씨앗까지 받을 수 있으니 그저 고마운 일이다."

배이슬 이든농장 농부 / 한국퍼머컬처네트워크 공동대표활동가 / 진안생태텃밭강사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농사로 익힌 다름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농사를 알리고 가르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존재 자체로 존중받는 안전한 지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일터인 '이든농장'은 전라북도 진안에 위치한 작은 농장이다. 논, 밭, 산이 조금씩 있고, 자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작물들을 심고 키우고 먹는다. 씨앗을 받고, 퍼머컬처 숲밭으로 전환해 나가고 있다.
편집자주 농가월령가'는 조선 시대에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농가에서 계절과 날씨 변화에 따라 할 일을 달의 순서로 읊을 수 있도록 만든 노래이다. 기후변화가 날로 심각해지는 오늘의 농꾼들은 언제 씨앗을 뿌리고 기르고 거둘까? 전북 진안의 배이슬 농꾼은 "24절기는 해의 시간, 달의 시간이 아니라 농사짓는 시기를 24개의 점으로 찍어 놓은 '농부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올 한 해 절기마다 그의 시간을 기록해 본다.
연재 보기
⑪ 소서, 작은 더위의 시작
⑫ 대서, 염소 뿔이 녹는다는

모기 입이 빳빳해지는 때, 처서 ?
처서는 멈출 처(處), 더울 서(暑) 더위가 멈추는 때라는 뜻이다. 입추를 지나 서서히 가을이 온다. 낮의 더위는 여전한 듯 매미소리가 밤까지 이어지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기후위기로 많이 달라졌지만, 시간의 구석에 절기가 묻어 있음을 알아차릴 때면 새삼 놀랍다.
처서에는 맹렬하던 더위가 멈추는 덕에 기승을 부리던 모기가 입이 삐뚤어진 것처럼 약해진다는 말이 있다. 청바지도 뚫고 물던 모기가 추위에 약해져 덜 무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다. 근래에는 더워도 너무 더워 외려 한여름의 모기가 줄었다. 추석이면 도톰한 긴 옷을 꺼내 입었었는데 작년 추석에는 물놀이를 할 만큼 더웠다. 여름에 주춤하던 모기가 가을 한복판에 기승을 부리니, 처서는 앞으로 모기 입이 삐뚤어지는 게 아니라 되려 모기 입이 빳빳해지는 때라고 바뀌게 생겼다.
백중날 호미씻이를 하고 벌레도 덜 타니 고추 따고, 참깨 베고, 배추 모종 내고 가을 농사로 바빠진다. 멈추는 더위 덕에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한여름 풀씨를 가득 단 풀들이 빠른 속도로 키를 키우기를 멈추고 씨앗이 영근다. 뒤돌아서면 자라던 풀이 성장을 멈춘다. 그래서 이때 벌초를 한다. 처서, 말 그대로 더위가 멈춰 풀도, 벌레들도 한풀 꺾여야 하는 때에 외려 늘어나는 추세라 벼도, 배추도 벌레를 타기 쉬운 때가 되었다.
처서에 장벼 패듯, 가을볕은 보약
처서는 더위가 나뉘는 시점으로 비교적 선선하지만 날이 밝고 볕이 좋아서 벼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다. 새끼치기를 부지런히 하던 벼가 이제 키를 키우는 것을 멈추고 꽃을 피우고 이삭을 키운다. ‘처서에 장벼 패듯’ 이라는 말은 충분히 자란 벼가 금세 이삭을 맺는 것을 보고 나온 말이다.

처서의 볕이 꽃가루받이를 돕고, 밤낮의 온도차로 벌레도 줄어든다. 벼가 씨앗을 만드는데 처서의 햇볕과 온도차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처서에 비가오면 독안의 쌀이 줄어든다’는 말도 있다. 벼꽃이 필 무렵 비가 오면 꽃가루가 잘 수정되지 않아 애써 자란 벼에 이삭이 덜 패기 때문이다. 어떤 농사든 때에 꼭 필요한 적절한 날씨와 온도가 있지만, 밥이 영그는 때이니만큼 예기치 못한 태풍이나, 잦은 비는 벼농사에 큰 피해로 이어진다. 그러니 가을볕이 잘 들어야 밥을 먹는다. 가을볕이 벼를 키우고 나를 키운다.
처서에는 장마철을 지나며 습하고 덥던 때에 축축해진 것들을 내어 말린다. 귀하게 광에 넣어 두었다가는 탱이가 나는 소쿠리며 용수며 잘 씻어 볕 잘 드는 장독 위에 말린다. 씨로 쓸 쪽파종구나 볕을 보면 삭는 살림살이들은 볕 안 들고 바람 잘 치는 뒤안에 말린다. 옛 사람들이 볕에 옷을 널어 말리는 '포쇄', 책을 그늘에 널어 말리던 풍습 '음건'이 지금도 농촌 살림에는 꼭 필요한 일이다.
더불어 큰 호박으로 키워야 하니 일찍 따낸 풋호박이나 여름 나물들을 볕을 쬐어 말린다. 이맘때 말린 것들은 제사나 명절이며 겨울의 말에 귀하게 쓰인다. 가을볕은 작물을 키우고 오랫동안 먹을 수 있게 저장한다. 그러니 가을볕을 보약이라 한다.
기장과 조가 익고 있다. 사진_배이슬
고추 따고, 참깨 베고, 가을 농사짓는 때
해가 갈수록 처서매직(처서가 오면 더위가 꺾이는)이 먼 말이 되고 있다. 덕분에 벌레들도 때 모르고 늘어나 가을 농사의 때를 가늠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빨갛게 익기 시작한 고추들을 따느라 땡볕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고추 잎사귀 사이로 보이는 빨간색만 보고 땄다가는 꼭지 쪽이 덜 익은 주황빛 고추를 따게 된다. 덜익은 것은 손으로 만졌을 때 광택이 돌고 매끈거린다. 잘 익은 고추는 새빨갛고 보다 어두운 색을 띄며 보드랍고 말랑하다.
좋은 볕을 따라 빠르게 익는 고추를 제때에 따서 말려 건고추로 내는 일은 목돈이 되는 일이라 진안에서는 중요한 농사 중 하나다.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따는 일은 못자리 못지않게 힘이 든다. 농촌에서 자랐지만 농사가 싫다는 한 친구는 어릴 때 부모님따라 고추 따는 일이 그렇게 힘들었단다. 옆집 친구도 고추를 따는데 늘 덜 익은 초록색 고추를 따서 야단을 맞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적녹색약이 있어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고추 따는 일을 시키지 않았단다.
여름날 고추를 따던 친구는 적녹색약인 친구가 부러웠단다. 얼마나 고추 따는 일이 싫었을지 알 것 같다. 쪼그리고 안자 수그린 목과 등이 아프고, 고춧잎 사이로 헤쳐 빨간 것들을 따는 것이 뜨거운 날 여간 대간한 일이다. 그렇게 하나씩 따서 말린 것이 1년 내 귀하게 먹게 되는 것이라 허투루 할 수 없다. 힘들게 고추를 따는 사이 5월에 심은 참깨는 참한 통꽃을 피우고 초록의 씨앗주머니를 맺었다. 줄기째 베어 비를 피해 말렸다가 훌훌 털어내어 키질을 하면 1년 먹을 참깨 농사는 이르게 끝이 난다.
참깨꽃, 참깨 꼬투리. 사진_배이슬
지어 입는 옷, 목화꽃 피는 때
5월에 심은 기장, 조가 영글고, 목화는 꽃이 피기 시작한다. 목화는 꽃이 3번 핀다고 한다. 하얗게 무궁화 같기도 오크라꽃 같기도 한 꽃이 키고 꽃가루를 받으면 붉은색으로 물이 든다. 하얀 꽃 옆으로 붉은 꽃이 다시 핀 것처럼 보인다. (꿀을 찾는 벌레들에게 이미 꽃가루를 받아 꿀이 없는 것을 알리느라 꽃잎은 질 때 색이 변한다.) 꽃이 진자리에 목화 다래가 열리고 추위가 다가오면 다시 하얗게 몽글몽글 솜 꽃이 핀다.
“그전에는 이런 다라이나 있었가니?! 나무 함지박 지고 다녔지” 종종 세상 좋아졌다는 할머니의 래퍼토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목화였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고 밥하고 일과를 마치면 밤을 새워 베를 짜던일, 할머니 뱃속에 아버지를 가지셨을 때 부지런히 베를 짠다고 베틀에 앉아 배를 탁탁 때리면 애기가 하도 맞아서 어디로 갔는지 한쪽으로 숨더라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말 그대로 의, 식, 주를 모두 직접 지어 삶을 짓던 때 목화와 삼은 꼭 심는 것이었지만, 땅심이 좋은 자리에는 곡식과 채소를 심고, 산밑에 땅심이 덜한 자리에 목화를 심었단다.
“할매, 옛날에는 목화도 먹었다는데? 지금 먹어? 어떻게 먹어?”
“그거 먹잘 것도 없는 게 한숭어리가 얼마나 귀한데 예사로 막 먹었간디. 산밑에 밭에 매다 보면 목도 타고 단맛 나는 게 귀한 게 몰래 하나씩이나 따먹었지. 얼른 따먹고 꼭지는 홀딱 땅에 묻었지. 먹은 줄 알면 혼나니까” 어디서 무명씨를 구해 와서는 멀쩡한 밭에 심냐던 할머니는 목화가 보일 때마다 한 보따리씩 옛이야기를 꺼내 주곤 했다.
볼록해진 목화 다래가 말랑말랑할 때 갈라서 솜이 되려고 모인 알맹이를 먹는 법을 알려 주셨다. 부드럽고 시원하고 달보드레한 맛이 났다. 사이가 좋았다는 할머니의 시어머니한테도 혼날까 봐 몰래 먹었다는 목화 다래는 자극적인 맛이 넘치는 지금에야 별맛이 없겠지만, 얼마나 귀한 단맛이었을까 싶다. 멋진 장식으로 만든 목화리스를 보면 목화 다래 맛이 먼저 생각난다. 할머니가 한 번씩 몰래 따먹었을 만하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시키면 싸게 온갖 옷가지를 사입지만 오롯이 실 한가닥부터도 씨앗으로 심고 거두어 바느질해 입었던 시절의 ‘옷’을 생각한다. 옷을 사 입었다가 아니라 지어 입는다고 말하던 때 목화꽃이 피면 옷을 키우고 있다는 생각에 신기한 마음이 든다.
목화꽃이 피었다. 질 무렵에 꽃 색이 변하고 붉은 색으로 다시 핀 듯하다. 꽃이 다 진 자리에 목화 다래가 열리고, 말랑말랑할 때 먹기 좋다. 다래 속은 솜이 될 준비를 하는 과육을 쏙 빼서 먹곤한다. 그러다 다시 하얗게 솜꽃으로 다시 핀다. 사진_배이슬
달라진 기후에 배추 농사
처서를 지날 때부터는 본격적인 가을 농사에 들어간다. 가을 농사는 심었던 것들을 잘 거두고 갈무리하는 일과 가을, 겨울나고 수확할 것들을 새로 심는 일이 함께 진행된다. 입추부터 키운 배추 모종을 농협에서 1판씩 나누어 줬다. 김치공장이 있는 지역농협에서는 조합원들에게 배추 모종을 키워 나눠 준다. 이때 키워 심는 배추는 대부분 배추 흰나비애벌레의 집과 먹이가 된다. 무르게 키운 개량종 배추인데다 날씨가 더운 참이라 더 그렇다.
잘 영근 배추 씨앗 꼬투리, 배추 씨앗은 품종마다 미세하게 색이 다르다. 처서가 지나고 배추 씨앗을 넣는다. 사진_배이슬
씨앗을 맺고 질겨진 풀들보다야 보드라운 어린잎의 배추가 얼마나 맛있을까. 내가 벌레여도 배춧잎을 먹겠다. 그렇게 길어진 더위에 심으면 벌레도 더 타고 가뭄도 더 타서 배추를 잘 키워내는 게 어렵다. 그래서 속은 덜 차더라도 부러 더 늦게 배추씨를 넣는다. 7월 무렵 말렸다가 씨앗을 받은 배추가 짧은 여름잠을 자고 다시 밭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작지만 속이 차고, 겉잎이 너울지듯 자라는 무릉배추, 키가 크고 속이 차지 않는 개성배추, 개량종 배추에서 고정해서 일반 배추에 가장 가깝게 생긴 구억배추, 배추 잎 못지 않게 시원하고 물이 적은 무 같기도 한 뿌리가 커지는 뿌리배추 등 갖가지 재래종 배추들은 처서를 지나 더위가 더 줄어들 무렵 씨를 넣는다.
배추 육묘를 밭에 냈다. 배추흰나미애벌레도 먹고 잎벌레도 먹고 나도 먹는다. 사진_배이슬

씨앗에서 씨앗으로 돌아오는 온전한 한 살이를 만나면 코딱지만한 배추 씨앗 안에 든 커다란 배추와 노랗게 펼쳐지는 배추꽃이 보인다. 배추 씨앗은 한번 잘 받아 두면 10년까지도 심을 수 있어서 해마다 다른 배추를 씨를 받는다. 잘 보관한 씨앗으로 조금 늦게 모종을 내는데, 육묘 시기에 속부터 갉아먹어 할머니는 도고통(절구통)벌레라고 부르는 잎벌레들도 가을이 완연해지면 배추잎을 덜 먹기 때문이다. 또한 속이 덜 찬 배추가 이듬해 씨앗을 받기에도 수월하다. 뭐든지 크고 수려한 것만이 좋은 줄 알지만 배추만 봐도 크다고 다 좋은 게 아니다. 크기가 크고 속이 찬 것일수록 겨울을 나기 어려워 씨앗을 받기에는 좋지 않다. 그렇게 잘 영근 것, 덜 영근 것 각기 쓰임과 맛이 다르다.
조금 덜 차면 어떠랴. 배추김치의 주재료가 되는 고추는 말리고 있고, 배추는 크기가 다르면 절일 때 품이 들지만, 크기야 어떻든 거름 많이 주고 무르게 키운 것보다 단단히 키워 질긴 듯한 것이 익을수록 맛이 좋다. 결국 달라진 기후에 농사 방법은 선택이다. 품을 더 들이고 크게 키워내는 것과 덜 들이고 덜 차도 제맛대로 키울 것을 선택하는 일이다. 기후가 달라질수록 할머니가 농사지었던 때처럼 더 늦게 씨를 뿌리고, 미리 만든 두둑에 유기물 두텁게 깔아 땅이 뜨겁거나 마르지 않게 보살핀 뒤에 배추를 심는다. 도고통벌레도 먹고 배추흰나비도 먹고 나도 먹고도 씨앗까지 받을 수 있으니 그저 고마운 일이다.
벌써 처서네요. 기후월령가를 읽으면 절기가 생생하게 다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