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날 풍경ㅣ우리의 1980년대 ③ 화염병과 폭력 시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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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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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7 최은
화염병, 짱돌, 각목, 파이프가 동원되었던 80년대 격렬한 학생 시위들, 그러나 60년대 독일 학생운동이나 70년대 일본 학생운동과 달리, ‘시위의 군사화’는 없었다. 왜 그리 되었을까? 정파를 막론하고 ‘대중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을 기본 노선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은 출판 기획자
지방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의 절반 이상을 서울시민으로 살고 있다. 사회생활은 노동계에서 시작했고, IT업계를 거쳐 몇 권의 책을 기획했다. 어쩌다 보니 10년 넘게 야간 노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지난 칼럼에 이어서)
석기시대 시위 풍경, 짱돌
‘염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내 시위이건, 가두 투쟁이건, 짱돌과 각목, 파이프를 동원한 시위 형태가 일반화되었다. 교내 시위에서 사용된 짱돌은 대부분 캠퍼스 내 야산과 공사장 같은 곳에서 줍거나 깨서 준비했다. 다행히(?) 한국의 지질학적 특성이 화강암 지대였기 때문에 그 많은 돌들이 날아다녔던 것 아닐까. 이런 식의 ‘투석전’(投石戰)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의 시위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가두 시위에서도 짱돌은 애용받는 폭력 수단이었다. 흔히 보도블럭이라 부르는 사각 바닥돌을 잘 깨면 대여섯 개의 짱돌이 나온다. 앞쪽에서 전투조가 돌을 던지는 동안, 뒤쪽에선 가로수 보호대를 뜯고 사전에 준비한 끌이나 망치로 바닥돌을 깨거나, 장비가 마땅치 않으면 바닥에 돌을 던져서 분리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과 아낙네들이 이렇게 싸웠을 것이라 했던 석기시대(石器時代) 풍경이었다.
격렬한 공방으로 속출했던 희생자들
이렇게 시위가 격화되면, 대열 선두에서 진압 경찰과 격렬한 공방이 벌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화염병과 짱돌이 비처럼 쏟아지고, 사과탄과 지랄탄(마치 뱀처럼 꿈틀거린다 하여 붙은 이름인데)과 직격 최루탄으로 연무가 자욱한 최전선에서, 각목과 파이프가 동원된 근접전이 벌어진다. 당연히 희생자가 속출했다.
때때로 ‘무슨무슨 결사대’라거나 사수대, 규찰대라는 이름으로 불린 일선 전투조의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연행되면 훈방(訓放)되지 않고, 구속을 각오해야 했다. 화염병 사용자의 경우, 현행 법상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대부분의 학교 앞 특정 건물의 옥상이나 창가에서 망원렌즈를 단 ‘사진채증조’가 시위대를 촬영했다. (그래서 그런 건물은 특히나 화염병의 목표가 되기 일쑤였고, 벽면이 그을리는 피해가 발생했다.) 연행되지 않는다 해도, 부상자는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팔이나 다리에 최루탄 파편이 박히는 경우는 사실 경미한 편이었고, 실명하거나 화상을 입게 된 경우도 수없이 많았다.
진압경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경찰병원의 입원실에서 가장 많은 환자가 ‘화상 피해자’였다. 비슷한 나이인 20대 청춘들이, 단지 시위대와 진압 경찰로 나뉘어 증오심을 불태운 그 시절이 80년대였다. 개중엔, 시위대로 짱돌을 던지다 입대하여 자기 출신 학교 앞에서 방패를 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87년 6월 시민항쟁의 전환점이 된, 연세대 이한열 역시 이런 격렬한 시위 현장에서 직격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 89년 5월 경, 부산의 동의대에서 발생한 공방전에서도 진압 경찰의 무리한 시도로 인해(휘발유와 유증기로 가득 찬 건물로 왜 그렇게 서둘러 진입했는지) 여러 명의 젊은 목숨이 생을 달리했다.

시위의 군사화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 시대를 회고하는 입장에서 다행이었던 점은 이런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시위의 군사화’는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코 어떤 폭탄도, 총기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어떤 암살도, 테러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단히 특이한 역사적 경험이자, 자랑이다.
예를 들어 60년대의 독일학생운동이 소위 ‘바더마인호프단’의 폭탄 테러로 귀결되고, 70년대의 일본학생운동이 ‘적군파’ 결성과 72년 2월 벌어진 ‘아사마산장 사건’으로 변질, 궤멸된 것만 상기해 보더라도 특이한 것이다. 이웃한 국가인 일본의 80년대 운동사는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핵파(中核派)와 혁마르파(革Mar派)로 나뉘어 국철테러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물론 전혀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주항쟁의 기억이 남아 있던 전남대와 조선대의 경우, ‘오월대’, ‘녹두대’라는 이름의 강력한 전투조직이 구성되었고, 수도권 대학 내 학생 조직 중 일부는 방학이나 MT를 이용하여, 일종의 모의 훈련을 수행했다. 구보와 행군, 투석 연습과 간단한 무술 수련 정도가 프로그램이었다. (아마도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는 며칠 동안 체력이 회복되는 효과 정도였을 것이다.)
이런 기억이 희한하게 변질된 경우가 영화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2002)에서 배두나가 송강호에게 ‘조직의 복수’ 운운하고, 후에 오광록과 신성근 등의 4인조가 송강호를 죽이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동맹’이라는 고풍스럽고 실존하지 않은(아니키즘은 80년대 운동사에선 찾아볼 수 없다) 이름을 들먹일 만큼, 한국의 80년대 학생운동은 아슬아슬하지만, 절대로 어떤 선 이상을 넘어가지 않았다.
다만 불행한 사고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82년 5월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당시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의미로 현관에 부은 기름이 불러온 화재로 인해 문화원 내에서 책을 읽던 동아대 장덕순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훗날 당시 사건의 주동자였던 김현장이나 문부식이 절대적 평화주의에 가까운 주장을 하게 된 것도 이 죽음에 대한 가책이었을 것이다. 학생운동은 아니지만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당시 울산에서 벌어진 시위에서 볼트와 너트를 파이프관에 넣어 발사했던 장면들도 예외적인 것이다.(이런 전술은 곧 용도폐기되었다)
'대중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이라는 기본 노선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정파를 막론하고, 일정 수준 이상의 폭력 사용을 자제하게 만든 것은, ‘대중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이라는 기본 노선에 있다. 이것을 ‘대중노선’ 혹은 ‘군중노선’이라 한다. 결국 어떤 운동이건 대중의 폭넓은 참여와 동의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 특히나 한국의 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중산층(당시엔 고색창연하게도 쁘띠브르조아라 칭했던) 혹은 사무직 노동자 계층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운동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것. 점점 더 많은 중산층 가정의 자제들이 대학생의 다수가 되던 시대적 상황에서, 학생운동 역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3일 시위, 신길동 가두 시위가 격렬했지만 이후로는
이런 교훈이 일반화된 계기는 87년 6월 항쟁 이전에 대규모 도심시위의 계기가 된, 신민당의 각 지역별 ‘개헌추진위원회 결성대회’였다. 특히나 86년 5월 3일 인천시민회관 앞 광장(지금의 시민공원역 일대)에서 펼쳐진 시위 사태(후일 5.3항쟁이라 불린)가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 이 대회에 수만 명이 결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급진적인 구호가 난무하고 격렬한 폭력투쟁(다음 날부터 모든 신문방송에서 정권의 입맛대로 해방구(解放區)라던지, 도시폭동전술이라 했던)은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단일 시위로는 가장 격렬한 것으로 평가받은 86년 11월 13일, ‘신길동 가두 시위’ 역시 그 격렬함의 대가로 35명이 구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소수파라 할 수 있는 CA그룹(제헌의회 소집을 주장한)이 전투성을 과시(?)한 것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이 나은 파장이 80년대 한국을 변화시킨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경찰이 수배자 박종운(서울대생이었고 후에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뉴라이트가 되었다가 대선에서 김문수 옆에 선)을 잡으려고 서울대 언어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한 학생을 연행했다. 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그가 죽었고, 이후 역사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거대한 변화의 국면으로 급변했다. 그의 이름은 박종철이다.
화염병과 폭력시위는 역사를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한 청년의 죽음은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이 되었고, 군부독재가 종말을 고하는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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